머나먼 일본에 와서 개망신당한 중원무림의 일인자 외팔이
21세기에 들어서는 와호장룡 등의 무협영화가 세계적으로 히트를 쳤지만, 그 이전에 가장 인기 있던 무협영화라면 뭐니 뭐니 해도 외팔이(獨臂刀) 였을 것이다.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獨臂刀)와 <돌아온 외팔이>(獨臂刀王)는 무협영화의 고전으로서, 이 두 편의 영화로 주인공인 왕우는 톱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1편인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에서 스승의 복수를 마친 외팔이 왕강은 2편 <돌아온 외팔이>에서는 중국 무림 최고수의 실력을 과시하며 무림을 지배하려는 악당들을 물리친다. 그는 이제 누구나 인정하는 강호 무림 제1인자이다.
외팔이는 오른팔을 잃어버린 그야말로 검객으로서는 최악의 신체적 조건을 딛고 무림 일인자로 우뚝 섰다. 정상인으로서 무림 일인자가 된 것보다는 이렇게 장애를 극복하고 무림 일인자가 된 것에 사람들은 더 환호를 하는지 모르겠다. 장애를 가진 검객의 이야기는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사극에도 장애를 가진 검객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젠(左膳)이다. 그는 오른팔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른쪽 눈도 잃었다. 그리고 여자 사젠도 있는데, 그 영화는 이 블로그에서도 이미 소개한 바 있다.
사젠과 함께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장애인 검객이 있으니, 바로 자토이치(座頭市)이다. 그는 앞을 못 보는 맹인이지만, 검술은 명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자토이치는 방랑생활을 하면서 약한 사람을 돕고 악인을 응징한다.
영화 <외팔이와 맹협>(獨臂刀大戦盲侠)은 중국 무협과 일본 검객 영화에 있어서 장애인 검객을 대표하는 외팔이와 자토이치를 함께 등장시킨 영화로서 홍콩과 일본의 합작으로 1971년에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홍콩에서는 <외팔이와 맹협의 대결투>>(獨臂刀大戦盲侠)로, 그리고 일본에서는 <신자토이치・격파하라! 중국검>(新座頭市・破れ!唐人剣)이란 제목으로 개봉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위와 같이 <외팔이와 맹협>이란 제목이 붙었다. 이 영화에서 외팔이 왕강 역은 역시 왕우가 맡았다.
외팔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으므로 일본의 떠돌이 맹인 검객 자토이치에 대해 잠깐 설명하고자 한다. 외팔이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사람은 아래의 링크를 참고하기 바란다.
자토이치는 험상궂은 얼굴을 한 맹인 협객인 자토(座頭) 신분의 이치(市)라는 사나이가 전국을 여행하면서 경이적인 검술로 악인들과 싸우는 액션 시대극이다. 일본 에도 시대에는 장애인들에 대해 막부가 사회복지 정책적 차원에서 특별한 직업을 지정해주고, 그 직업에 대해서는 독점권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위해 각 장애인들이 조합을 만들어 자신들의 권익과 직업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시각장애인(맹인)들에 대해서는 주로 안마를 비롯한 몇몇 직종에 대해 배타적 독점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시각장애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조합을 만들었는데, 조합 안에는 몇 단계의 지위가 있었다. 자토는 장애인 조합 안에 있는 몇 개의 지위 가운데 하나였다. 즉 자토이치에서 자토는 장애인 조합에서의 지위, 이치는 검객의 이름인 것이다. 그런데 이 자토이치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워낙 유명한 캐릭터가 되다 보니, 자토이치가 그냥 이름처럼 통용된 것이다.
중국에서 전란을 피해 일본에 와서 사는 젊은 중국인 부부와 아들이 있다. 젊은 부부는 장사를 해서 겨우 먹고사는데, 어느 날 어린 아들 소영이 실수로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의 행렬을 흩트린다. 이 행렬은 단순한 행렬이 아니라 뭔가 뒤가 구린 것을 운반하고 있었다. 행렬을 호위하던 무사는 아이는 물론 주위에 있는 모든 백성들을 죽이려고 한다. 아이의 부모와 많은 백성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어떤 중국인 외팔이 검객이 나타나 겨우 소영이 만을 구해준다. 영주는 도망친 중국인과 아이에 대한 체포령을 내린다. 그 외팔이 검객은 중국에서 싸움이 싫어 일본으로 이제 막 건너온 중국 무림 제1인자 왕강으로서, 그는 지인이 있는 사찰을 찾아가는 중이다.
소영이를 데리고 도피하던 왕강은 인상이 험악한 떠돌이 장님의 낭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바로 자토이치이다. 왕강과 자토이치는 모두 악을 미워하고, 약한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들인데, 둘 사이에는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 왕강은 중국어를 하고, 자토이치는 일본어를 말하니까 의사소통이 될 리가 없다. 필담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자토이치가 맹인이기 때문에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둘은 소영이의 서툰 통역으로 가까스로 의사소통을 하며, 그나마 소영이 없으면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
왕강과 자토이치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 보니 둘 사이에는 자꾸 오해가 생긴다. 예를 들면 자토이치가 식량을 구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간데 대해 왕강은 그가 밀고를 위해 떠났다고 오해를 하고, 자토이치는 자토이치대로 왕강의 마음을 알 리가 없고, 또 자신을 오해하는 왕강에게 섭섭한 마음도 가진다. 어쨌던 여러 우여곡절이 있고 위기도 있었지만 외팔이와 자토이치는 소영을 잘 도피시키고, 그리고 그들을 쫓는 영주의 군사들을 퇴치한다.
그렇지만 둘 사이의 오해는 계속되어 마침내 둘은 영주의 군사들을 비롯한 악당들을 모두 처단한 후 서로 결투를 벌이게 된다. 둘의 결투 끝에 외팔이는 자토이치의 칼을 맞고 죽어간다. 죽어가는 외팔이에게 자신들을 도우던 마을 처녀들도 달려오고, 자토이치는 그제야 둘의 대결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인 걸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자토이치는 늘 그렇듯이 담담한 얼굴로 길을 떠난다.
중원의 천하 일인자 외팔이는 이렇게 싸움이 없는 안락한 생활을 위해 먼 일본까지 찾아왔건만 맹인 검객의 칼에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환기시켜주는 영화라 할까... 중국인들이 보면 가슴을 칠 일이다. 그런데 내가 감상한 영화는 일본판이었다. 이 영화는 홍콩과 일본의 합작인 만큼 일본 버전과 홍콩 버전의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홍콩 버전에서는 외팔이가 승리하고, 자토이치가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