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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Nov 09. 2022

영화: 고베 국제 갱(神戸国際ギャング)

전후 폐허가 된 고베 시를 무대로 한 야쿠자들의 격돌

제2차 세계대전 연일 계속되는 미군의 폭격으로 일본의 주요 도시는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일본이 마침내 항복하고 미군이 점령군으로서 일본 본토에 진주하였다. 이 시기 치안 등 행정업무는 일본 정부가 담당하였지만 미국 점령군 본부는 일본 정부의 활동을 감독하였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일본은 많은 시민들이 살기 위해 밑바닥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살기가 어려울수록 활개를 치는 것이 범죄자들이다. 일본은 이전부터 조직폭력배, 즉 야쿠자들의 활동이 성행하였지만, 전쟁 직후라는 치안 불안 상황에서 이들은 더욱 날뛰었다. 모두가 가난하고 물자가 부족하였던 이 시대 야쿠자들은 더욱 극성을 부리며 사람들을 쥐어짰고, 그런 와중에서 제한된 이권을 둘러싸고 야쿠자 조직 간의 싸움도 치열하였다. 일본에서 야쿠자들의 크게 활개를 치는 지역은 주로 일본의 서쪽 지역으로서, 히로시마에 근거를 두고 있는 야마구치 구미(山口組)는 지금도 일본 최대의 폭력조직으로서 유명하다. 이 외에도 고베와 오사카 등 칸사이 지역 도시에서 야쿠자들의 활동이 극성을 떨었다. 

영화 <고베 국제 갱>(神戸国際ギャング)은 일본의 패전 직후 시대인 1947년에 고베(神戸) 시를 무대로 야쿠자들이 벌이는 싸움과 내분을 그리고 있는 영화로서, 1975년에 제작되었다. 1960-70년대에 걸쳐 야쿠자 영화의 스타 배우였던 다카쿠라 겐(高倉健)이 주인공 단 마사토(団正人) 역을 연기한다. 


이 영화의 제목이 <고베 국제 갱>이므로 세계를 무대로 벌이는 야쿠자들의 싸움인 것처럼 보여진다. 그렇지만 패전 직후의 피폐한 환경에서 일본의 폭력단들이 국제무대에서 활동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이들이 서민의 등을 치고, 미 군수 물자를 빼돌리고, 마약을 판매하여 돈을 번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겨우 거지 수준을 면한 정도다. 그런 야쿠자들이 국제적으로 설치고 다닐 수는 없다.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인 단 마사토가 이끄는 일본 야쿠자 조직과 중국계 폭력단, 그리고 한국계 폭력단이 서로 세력 다툼을 벌이고, 또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단 마사토의 조직 내부에서 벌어지는 알력을 그리고 있다. 


고베에서 폭력단을 이끌고 있는 단 마사토는 다른 폭력배 두목과는 달리 어느 정도의 학력을 갖춘 자이다. 그는 다른 폭력단처럼 일반 시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지는 않지만 싸움에서는 잔인하고 흉폭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이다. 단은 부하들을 이끌고 주로 전쟁 시 은닉된 물자나 미군 점령군의 군수물자를 빼돌려 돈을 벌고 있다. 그들이 빼돌린 물자는 양덕원(楊徳元) 회장이 이끄는 중국계 폭력조직인 구룡동맹이 처분하고 있다. 

구룡동맹이 물자 처리 과정에서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한 단은 부하들을 이끌고 양 회장의 본부에 난입한다. 이들의 기세에 질린 양 회장은 화친을 제안하고, 이익을 적절히 배분할 것에 동의한다. 이때부터 양 회장은 단에게 고분고분하며 그를 지원한다. 양 회장은 단의 조직이 가져온 물자의 처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번 물자를 탈취당하고 조직원이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것은 박성림(朴林成)이 이끄는 한국계 폭력단의 짓이다. 


단은 박성림이 주말을 교외에 있는 별장에서 보낸다는 사실을 알고, 별장으로 난입한다. 박성림은 부하 한 명 없이 혼자인 상태에서 단 일행의 습격을 받았는데, 그는 앞으로 서로 협조하며 지내자는 단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러자 단은 그 자리에서 박성림을 사살한다. 


단은 미군부대의 물자를 빼돌리다가 미군의 추격을 받는다. 누군가 계획을 사전에 밀고하였던 것이다. 결국 단은 체포되어 중형을 받고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나, 손을 써서 빨리 출옥을 하게 된다. 출옥한 단은 자신을 밀고한 자들을 처단하고, 마야 부두(摩耶埠頭)에서 다이아몬드를 강탈할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은 미군의 악덕 헌병과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부두에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진다. 총격전 속에서 단의 부하들은 하나씩 죽어가고 단도 결국 애인인 마키의 품속에서 죽어간다. 마키는 죽어가는 단을 안은채 가솔린 탱크에 총을 쏘며 가솔린 탱크는 거대한 폭음과 대폭발을 일으킨다. 마치 야쿠자 단의 치열한 삶을 상징하듯이.


이 영화 제목으로부터는 조직폭력단 간의 치열한 싸움을 상상하겠지만, 실제로는 그 싸움이 너무나 싱겁게 끝난다. 중국 야쿠자 두목 양 회장은 단이 난입하자 그 자리에서 화친을 제안한다. 그리고 한국계 폭력단 두복 박성림은 대단한 카리스마를 가진 폭력조직 보스처럼 보이지만, 제대로 된 싸움 한번 없이 단에 의해 사살된다. 볼만한 싸움 장면이라면 마지막에 다이아몬드 강탈을 둘러싼 폭력단과 미군 헌병 및 경찰 간의 치열한 총격전이다. 

이 영화에서 양 회장이 이끄는 구룡동맹은 중국계 폭력조직이라고 나오지만, 박성림이 이끄는 조직은 한국계 폭력조직이지만, 한국계란 말은 나오지 않고 삼국(三國) 조직이라 표현된다. 이것은 왜 그럴까?


미군이 일본에 진주하여 전후 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일본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 일본인 이외의 사람들을 “제삼국인” 혹은 “삼국인”이라 표현하였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일본인 외에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이나 중국인 등을 제삼국인 혹은 삼국인으로 불렀는데, 점차 이 말은 한국인을 표현하는 말이 되었다. 즉 중국인에 대해서는 중국인이라는 말을 직접 쓰면서 한국인에게는 제삼국인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 영화나 소설에서는 외국인,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인을 악당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영화나 소설에서 한국인이나 중국인, 혹은 그 밖의 나라 사람을 악당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가 특히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으므로 괜히 악당을 한국인으로 명시하였다가는 한국으로부터 강력한 항의가 들어올 우려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유독 한국인 악당에 대해서만은 “제삼국인”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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