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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Aug 06. 2022

임진왜란(02) 왜군의 병력

조선을 침략한 왜군의 병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먼저 임진왜란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로 당시 조선을 침략한 왜군의 병력 규모와 그 특징을 알아보자.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군의 병력은 16만 명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였다. 전체 병력은 9개 부대와 8,000명이 조금 넘는 수군으로 편성되었다. 1개 부대는 대략 1만 명~2만 명 정도로 구성되었다. 이들 외에 침략의 전초기지인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성에는 예비부대로서 10만 명 정도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조선 침공을 위해 26만 명을 준비해두고, 그 가운데 16만 명을 파병한 것이다. 히젠 나고야란 지금의 일본 규슈의 제일 위쪽 끝단인 사가(佐賀) 시 지역으로서, 조선과 가장 가까운 곳이다. 


그럼 이 시기 일본의 군사 총병력은 어느 정도 되었는가? 이를 측정하기 위한 좋은 척도가 있다. 바로 영지의 곡식 수확량(石高, 고쿠다카)이다. 우리가 일본 사극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영주를 소개할 때 곡식 수확량을 함께 언급하는 것을 종종 본다. 예를 들면 도쿠가와 이에야스 250만 석, 마에다 100만 석하는 식이다. 이 수확량은 영주들의 세력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일본 전국시대의 경우 100석에 병사 2.5인 정도를 보유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탈탈 털어서 군비를 확충하자면 100석당 5~6인도 가능하지만, 이는 서스테이너블 하지 못하다. 


이래서 영주들의 병력 수는 쉽게 추산된다. 1만 석의 영주는 250명, 10만 석의 영주는 2,500명 정도의 병력을 보유한다. 당시 세력이 제일 컸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250만 석이었으므로 6만 명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당시 일본의 총수확량은 어느 정도 되었을까? 대략 2천만 석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본 전채로 50만 명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상비군으로 따지면 세계 최대의 병력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명도 이 정도의 상비군을 가졌을지 의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일본 지역의 영주들을 중심으로 침략군을 편성하였다. 그는 지역에 따라 100석당 4~6인의 병력을 차출하도록 하였다. 대상이 된 영주들은 그야말로 탈탈 털어서 병력을 마련하였을 것이다.


그럼 왜군의 군대 편제는 어쨌을까? 요즘 현대 군같이 사단, 연대, 대대, 중대, 소대와 같이 조직과 명령전달 체계가 일원화된 체계가 아니었다. 9개 부대 및 수군은 각각 여러 영주가 동원한 연합군 형태를 가졌다. 각 부대의 지휘관은 원칙적으로는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한 영주가 맡는 것으로 하였지만, 도요토미와 관계가 먼 영주(토자마 다이묘: 外様大名)에게는 지휘권을 맡기지 않고, 도요토미 직계 영주들이 지휘관이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총대장은 잘 아시다시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인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로서 당시 19세의 나이였다.

전국 시대의 일본군의 전투 모습

일본군의 군대 편제를 보기 위해 1번대의 예를 보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幸長)가 대장으로서 18,700명의 병력 중 7,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였고 다음으로 대마도주인 소 요시유키(宗義之)가 5,000명을, 마츠우라 시게노부 3,000명, 키무라 요시아키 1,000명, 아리마 하루노부 2,000명, 고토 스미하루 700명 등이었다. 이렇게 영주들이 각각 자신의 군대를 끌고 나왔기에 일사불란한 명령체계가 어려웠다. "다 같은 영주인데, 네가 뭐라고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이런 식의 다툼이 잦았다. 더욱이 전군 총대장이 19살 어린애이다 보니 백전노장의 영주들이 그에게 고분고분할 리가 없었다. 


예를 들자면 고양시장, 경주시장, 양평군수, 청송군수가 끌고 온 병사들로서 한 부대를 만든 후 경주시장에게 지휘관을 맡겼다 생각해보자. 다른 시장과 군수들은 당연히 "니가 뭔데 나한테 명령해"라며 반발할 것이 눈에 뻔히 보인다. 일본에서도 왜군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명령체계의 혼란을 꼽고 있다.


수천 명의 병력을 동원한 영주의 경우 직접 전체 병력을 지휘할 수는 없다. 중간 지휘자가 있어야 한다. 중간 지휘자가 바로 하타모토(旗本)이다. 하타모토는 현대의 중대장이나 소대장처럼 단순한 전투 지휘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영주로부터 최소 2,000석에 상당하는 땅을 받고, 거기에 비례하여 병력을 모으고, 이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즉, 병사의 모집에서 무기 조달, 병사의 생계, 그리고 전공 평가에까지 책임을 진다. 즉 한 사람의 하타모토와 그가 이끄는 병사는 운명공동체인 셈이다. 로마제국의 백부장 제도를 연상시키나, 그보다 더 강력한 공동체라 할 것이다.


이렇다 보니 군 편성은 병과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영주 별로 이루어졌다. 즉 부대 지휘관은 "조총부대 뒤로 빠지고, 창병 앞으로 전진!" 식으로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니라, 나카무라 부대는 중앙을 공격하고, 야마모토 부대는 오른쪽을 친다"하는 식이었다. 그러면 명령을 받은 영주가 자신의 부대에 속해있는 조총부대, 창병, 궁병 부대 등을 스스로 알아서 배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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