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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Aug 14. 2022

임진왜란(5): 조선 수군

조선 수군의 전력: 병력과 함선

지난번에는 왜군 수군의 전력을 살펴보았으니, 이제 조선 수군의 전력을 알아보자.  


조선은 외침에 시달림없이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어 온 탓에 육군은 거의 지리멸렬했던 것 같다. 군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분되었는데, 지방군은 그야말로 장부 상으로만 존재하는 군대였던 것 같다. 이에 비해 수군은 의외로 탄탄했던 것 같다. 지속적인 왜구의 출몰로 육군보다는 훨씬 더 긴장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도 이 시기에 들어서는 점점 줄어들어 수군을 축소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고 한다.  


수군 기지라 할 수 있는 수영(水營)은 각 도에 한 개씩 두고 있는데, 남해안은 왜구의 출몰이 잦아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각각 좌수영과 우수영 두 개씩을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수영들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을까? 병력은 어느 정도이며, 함선은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었을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이 보유한 판옥선의 수가 24척이었다고 한다. 판옥선은 크기에 따라 대, 중, 소 3종류가 있었는데, 대선의 경우 130명 정도가 승선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략 전체적으로 1척에 평균 100명이 승선한다고 가정하면 2,400명, 거기다가 함대를 보조하는 다수의 부속선, 그리고 여타 인력 등을 고려한다면 3-4천 명 정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원균의 경상우수영의 경우 원균이 스스로 침몰시킨 판옥선만 54척이라 한다. 그러니까 경상우수영은 전라좌수영에 비해 규모가 훨씬 컸던 것 같다. 이 정도 함선 규모라면 병력은 적어도 6-7천 명은 되지 않았을까? 이런 부대 규모를 생각할 때 원균은 자신이 이순신보다 서열이 높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여러 기록을 통해 나타나는 이순신에 대한 원균의 질투심은 여기서부터 출발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왼쪽은 부안 소재 전라좌수영 세트장, 오른쪽은 여수의 전라좌수영

그런데 수영에 속한 수군들은 상비군이 아니었다고 한다.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수사가 격군(노 젓는 병사)과 전투병을 소집하여 함대를 구성하였다고 한다. 평상시에 수영에 상근 하는 병사들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사실을 통해 원균이 함선을 스스로 침몰시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갑자기 왜병이 쳐들어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도 모를 혼란이 생겼는데, 수사가 소집령을 발령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제대로 먹히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부대 복귀는 둘 째고 내 목숨, 내 가족의 목숨이 우선일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도 원균이 스스로 배들을 침몰시켰다는 말을 듣고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수긍하였다고 한다.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함은 판옥선이다. 판옥선은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여러 전투함들을 개량을 거듭하여 만든 것으로 조선 초부터 조선 수군의 주력함이 되었다고 한다. 종래의 전투함들은 격군(노 젓는 병사)과 전투병이 같은 공간을 사용하여 전투 시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는데, 이를 개선하여 배 아래쪽에 격군을 두고, 배 위쪽에 판옥을 깔아 전투병들은 2층에서 전투를 하게 하였다고 한다. 보통 소나무로 배를 건조하여 배가 무척 튼튼하였으며, 배 밑바닥이 평평하여 전후좌우 방향 전환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 전투에서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신 속력이 아주 느렸으며, 배가 불안정하다는 단점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 수군의 전투 장면과 판옥선

판옥선은 크기에 따라 대, 중, 소 세 종류가 있었다고 한다. 판옥선의 크기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다소 다른데 임진왜란 때 사용된 대형 판옥선의 경우 길이가 25미터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또 해군에서 나온 자료에 따르면 길이가 32미터 정도라 하기도 한다. 중형 및 소형 판옥선에 대해서는 그 크기나 승선 인원에 대한 특별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대형 판옥선의 경우 일본 수군의 아다케부네와 길이는 비슷하지만 높이는 더 높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조선 수군의 전함인 판옥선은 크기가 대, 중, 소의 3종류가 있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동일하다. 이에 비해 왜 수군의 전투함인 아다케부네(安宅船)와 세키부네(關船), 그리고 코바야부네(小早船)는 서로 모습과 구조 자체가 다르다. 선박의 크기를 비교하자면 대형 판옥선은 아다케부네에 비해 같거나 조금 더 크며, 중형 판옥선은 세키부네에 비해 조금 더 클 것으로 추정되며, 소형 판옥선은 코바야부네에 비해 월등히 더 큰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소형 판옥선이 세키부네와 크기가 비슷하거나 좀 더 크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순신하면 바로 연상되는 것이 거북선. 잘 아시다시피 판옥선에다 목재로 된 덮개를 씌우고, 그 덮개 위에는 적군이 오르지 못하도록 송곳 같은 쇠못을 박아 놓은 배다. 그리고 거북의 입과 배 양쪽으로 화포가 발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거북선의 입으로 화포를 발사한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다. 화포를 발사하려면 화포를 발사할 병사와 그에 필요한 공간이 있어야 할 것인데, 우리가 그림과 사진을 통해 볼 수 있는 거북선의 입에는 병사가 화포를 발포할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거북선의 입으로는 도저히 화포를 쏠 수 없었을 것이고, 아마 연기를 내뿜거나 했을 것이다.      

수군 전투 모습과 거북선

거북선은 이미 조선 초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 이순신 장군은 이를 더욱 개량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3척이 있었으며, 한 척당 130명 정도가 탑승하였다고 하는데, 공격선으로서의 장점도 있지만 궁수의 수와 활동이 제약되는 단점도 있어 일부러 많이 제작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거북선을 과거에는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고도 하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철갑선은 아니며 나무로 된 지붕을 덮고 그 위에 검은 옻칠을 하였다. 


철갑선(鐵甲船)이란 말이 나온 김에 잠시 옆으로 빠지자면, 철갑선은 이전에 일본에서도 이미 만들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모리(毛利) 씨와의 해전에서 패한 후, 설욕을 위해 1578년 그의 지배를 받고 있는 쿠키 요시다카(九鬼嘉隆) 에게 명하여 만든 것이 철갑선이다. 이 철갑선은 아다케부네에 철갑을 씌운 것으로서, 쿠키는 6척을 건조하여 전투에 투입하였다고 한다. 


다만 이 철갑선의 형태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수수께끼이다. 철갑선의 상상도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철갑선의 상상도를 보면 배 위에 마치 높이가 높은 컨테이너 같은 장방형의 철 상자를 얹어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철갑선을 만들었다고 하는 쿠키 요시다카는 바로 임진왜란 시 일본 수군 대장이다. 

쿠키 요시다카의 철갑선과 전투 모습

또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철갑선을 만들었다고 한다. 1595년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고 한다.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은 이번 조선 정벌을 위하여 몇 척인가 매우 큰 선박을 건조하였다. 그 배들은 모두 수면부터 위는 철로 덮여있고, 중앙에 선루가 있다. 연결하는 선교는 모두 철로 덮혀져, 목조 부분은 노출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모두가 매우 아름답게 도금되어 있어 감상할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때때로 배에 들아가 보았다. 배 건조장에 있는 배의 크기를 재어보았더니 길이가 19미터였다. 여러 명의 포르투갈 인들이 이 배들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그 배들은 약체로서, 선골에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몇 척인가가 찢어져 침몰해 버렸다. “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철갑선은 이 문서 외에는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는다. 실제로 배들이 완성되었는지, 또 완성되었다면 실제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아마 완성되었거나 사용되었다면 기록이 남아 있을 텐데, 그것이 없는 것을 보면 도중에 그만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조선 수군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임란 당시 조선수군에는 판옥선을 보조하는 협선(挾船)이라는 작은 배가 있었다. 여기에는 전투병은 타지 않고 3명의 격군(노 젓는 병사)만이 승선하였다고 한다. 주로 척후, 정찰 임무 등과 함께 전투 시에는 전투함인 판옥선 사이를 오가며 판옥선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실제 전투에서 협선의 임무는 매우 중요하여, 대체로 판옥선 한 척당 한 척의 협선이 배정되었다고 한다. 


이 외에 또 포착선이라는 작은 배가 있었다. 이 배는 군선이라기보다는 평상시에 해녀들이 타는 배인데, 함대의 위세를 과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옥포 해전에서 포착선을 처음 사용했는데, 이후에는 실용성이 없다고 판단되어 그다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명령해전 때 왜군에 비해 조선 함선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어서 병선의 수를 과시하기 위해 후방에 배치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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