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화에서 악(惡)과 정의(正義)는 무엇인가?
영화 가운데 전쟁영화만큼 선악의 구도가 분명한 것이 없다. 대부분의 영화가 우리 편은 선(善)이고 상대편은 악(惡)이다. 그런데 전쟁영화에서 선악을 결정짓는 2가지 요소가 있는데, 바로 전쟁의 동기와 휴머니즘이다.
전쟁의 동기에 따른 선악의 구분은 비교적 분명하다.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둔 판단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제2차 세계대전, 미국 남북전쟁, 임진왜란, 아편전쟁 등과 같은 전쟁은 누구에게 묻더라도 어느 쪽이 악이고 어느 쪽이 선인지 분명하다. 이미 역사적으로 판단이 내려진 전쟁이기 때문이다. 물론 중동전쟁, 유럽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전쟁들같이 아직도 당사국들이 각자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전쟁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 휴머니즘이 가미되면 가치판단이 모호해진다. 전쟁영화에서 그려지는 휴머니즘은 사람의 문제로서, 사람이란 수많은 유형이 있으며 그런 만큼 드라마에 의해 얼마든지 달리 묘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임진왜란 때 일본은 아무런 이유 없이 조선을 침략해 갖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런데 일본에서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한다고 하자. 그리고 일단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즉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것-은 사실대로 묘사한다고 하자. 그런데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왜군 병사는 굶주린 조선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부모 잃고 죽어가는 조선 아이들을 구해주는 착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대신 조선 군사들은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산을 빼앗으며, 적군이 오면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사람으로 그린다. 그렇게 되면 영화에서는 졸지에 [왜병=선, 조선군=악]으로 둔갑하게 된다. 즉, 전쟁에 휴머니즘이라는 픽션을 이용함으로 전쟁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적군을 인간적으로도 악인으로 묘사해야 전쟁의 선악구도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영화에서 미국의 적군은 전쟁을 도발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나쁜 놈으로 그려지게 된다. 지금까지 큰 전쟁에서 미국은 대개 정의의 편에 서있었다. 미국 독립전쟁이 그랬고, 제1차 대전, 제2차 대전도 마찬가지다. 이후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등 그 정당성에 논란이 많은 전쟁도 있지만, 미국이 이미 세계 패권 국가이므로 그 정당성에 대한 논란도 크지 않다. 전쟁 당사국인 미국은 여전히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서 제작한 전쟁영화는 대부분 미군의 영웅적 활약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인 미군은 어려운 상황에서 불굴의 용기로 싸워 끝없이 밀려드는 독일군, 일본군들을 격퇴한다. 람보 앞에서는 월남군들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이다. 이에 비해 독일군이나 일본군들은 평시에도 갖은 악행을 저지르며, 전투가 벌어지면 미군을 향해 끊임없이 공격하지만 항상 비참하게 패배한다.
그런데 독일이나 일본에서 제작한 전쟁영화는 어떨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은 잘못된 전쟁을 일으킨 악이라는 결론이 이미 역사적으로 내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군대를 영웅시하기는 어렵다는 난처한 상황에 있다. 일본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하는 영화를 만들어 일본군의 영웅적 활약을 그린다면 악이 정의를 이기는 불의를 찬양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영화처럼 미군에게 쥐어터지기만 하는 일본군을 그릴 수는 없다. 국민감정이 용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본 국내에서 흥행이 될 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이나 일본의 전쟁영화에서 활용되는 것이 휴머니즘이다.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전쟁에 대한 회의, 가족애, 친구나 연인들과의 사랑, 동료애, 전우애 등 휴머니즘적인 측면에서 전쟁에 접근한다. 미국 영화에서 항상 나오는 독일군이나 일본군들의 민간인에 대한 악행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점령지에서 주민들과 따뜻한 유대관계를 가지며, 전쟁에 대한 인간적 고뇌를 하며, 고향에 있는 가족과 연인을 그린다. 그래서 독일이나 일본에서 만든 전쟁영화에는 화끈한 전투 신이 없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외국 전쟁영화는 대부분 미국 영화다. 그러므로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미군은 선, 즉 정의의 편에 서있다. 미군은 항상 역경을 헤치고 승리한다. 최근 2편의 흥미 있는 전쟁영화를 감상했다. <늑대들의 계곡, 이라크>와 <비스트>이다.
<늑대들의 계곡, 이라크>는 2006년 터키에서 제작한 영화이다. 이라크 전쟁을 무대로 이라크에 주둔한 미군에 의한 야만적인 행동, 미군을 등에 업은 전쟁 상인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터키 특수부대원의 이야기이다. 영화의 소재가 되는 미군의 터키군 두건 추방사건, 결혼식장 난입 학살사건은 실제 일어난 사건이다. “터키군 두건 추방사건”이란 미군들은 이라크에 있는 터키군들에게 수갑을 채우고 머리에 두건을 씌워 터키로 추방한 사건으로서, 이 사건은 지금도 터키인들에 의해 치욕적인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영화에서 미군은 악으로 그려지고, 이에 맞서 싸우는 4명의 터키 특수부대원은 종횡무진 활약한다. 이들 앞에서는 중무장한 미군들도 추풍낙엽이다. 미군의 탄압을 받는 크루드족들은 용기 있고 정의로운 사람들로 묘사된다.
다만 미군들의 포로 학대 사건, 또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미군을 등에 업은 전쟁 상인의 이라크인 학살과 장기 적출 매매 등 이라크 전쟁 중에 일어난 미군의 여러 만행들이 영화 스토리와 어울리지 않게 뜬금없이 나와 스토리의 완성도는 많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어쨌든 이 영화는 미군이 악으로 묘사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영화이다.
<비스트>는 1988년 미국에서 제작한 영화로서,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다룬 영화이다. 아프간을 침공한 소련군 전차부대가 어느 마을에 침입하여 다짜고짜 마을을 초토화시켜 버린다. 탱크포와 기관총, 화염방사기로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학살한다. 심지어는 반항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이유로 주민을 탱크 아래에 눕혀놓고 탱크로 깔아버리기도 한다. 그 후 소련군 탱크부대가 이동하면서 탱크 한 대가 길을 잃고 낙오한다. 가장 악독한 짓을 저지른 바로 그 탱크다.
탱크 낙오를 알아챈 아프간 민병대는 탱크를 추격한다. 탱크는 필사적으로 도망간다. 마치 개미에게 쫓기는 코끼리 같다. 소련군 탱크에는 5명의 전차병이 탑승해 있는데, 지휘관 다스칼은 아주 악독한 인간이다. 아버지와 형이 나치와 싸우다 전사했고 자기는 나치의 만행을 목격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다스칼은 부하들 조차도 의심하여 아프간인 부하를 사살하고, 자기에게 반항하는 주인공인 탱크 운전병도 늑대의 밥으로 만들려고 한다.
아프간 민병대의 자비로 목숨을 건진 탱크 운전병(주인공)은 민병대에 합세하여 탱크를 쫒는다. 하지만 소총으로 탱크를 대항하기는 무리. 비장의 무기였던 로켓포 공격으로도 탱크를 파괴하는데 실패한다. 추격대들이 절망하는 순간 산사태가 일어나 탱크가 파괴된다. 산사태는 남편과 약혼자, 아이들을 잃은 여자들이 수류탄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악인 다스칼은 여자들의 돌팔매에 의해 죽는다.
영화 <비스트>에서 이슬람교도인 아프간 인들은 착하고, 용기 있고, 정의로우며, 자비로운 사람들로 묘사된다. 아프간 인들은 이슬람 율법에 의해 자비를 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비록 적이라 할지라도. 주인공인 전차 운전병도 아프간 민병대에 잡혀 죽임을 당할 순간 그들에게 자비를 구하자 민병대들은 그를 용서한다. 심지어는 악인 다스 칼 조차 자비를 구하자 용서하고 놓아준다. 분노한 여자들이 따라가 그를 돌팔매로 죽이긴 하지만.
이 영화를 제작할 때인 1988년, 소련은 여전히 미국의 최대 적국이었고, 미국은 아프간 민병대를 적극 지원했다. 그 민병대들이 나중엔 탈레반이 되어 미국과 싸운다. 잘 알다시피 탈레반은 야만족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미국은 이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소탕 전쟁에 나섰다. 영화 비스트에서는 <소련군=악, 아프간 민병대=정의>로 그렸다. 만약 이 영화가 20년쯤 뒤인 2000년대 후반쯤 미군과 탈레반이 싸울 때 제작되었다면 선악구도가 또 어떻게 설정되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