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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Aug 25. 2022

임진왜란(8): 조선 수군의 화포

조선 수군의 전투방식과 화포

우리나라는 역사 이래 수많은 외침에 시달려 왔지만, 선조들은 전쟁에 있어서 몸과 몸이 부딪히는 백병전을 아주 싫어했던 것 같다. 외적과의 싸움에서 우리나라가 거둔 대승은 대부분 성을 끼고 하는 싸움이었다. 수나라의 백만 대군 에게 승리한 것도 요동성이 끝까지 버텼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고, 당 태종이 침략했을 때도 야전에서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양만춘이 안시성을 굳건히 지킴으로써 이를 퇴치할 수 있었다. 그 이후의 많은 외적과의 많은 전쟁에서도 성을 끼고 하는 전투에서 특히 위력을 발휘하였다. 백병전은 근접전이지만 공성전은 상대적으로 원거리 전투이다. 


임진왜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 하는 행주대첩, 진주성대첩, 한산대첩 모두 원거리 전투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해 근거리 전투였던 탄금대 전투, 용인 전투 등 대부분의 전투에서 우리는 참패를 면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야전에서 취약점을 보인 것은 물론 조선 병사들의 훈련이 거의 되어 있지 않은 점도 있겠지만, 훈련을 하더라도 칼이나 창 등 백병전 전술은 매우 등한시 하였다고 한다. 유성룡은 조선 병사들의 훈련을 보고 병사들이 칼을 쓰는 훈련도 받지 못한다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우리 민족에게 이러한 원거리 전투 DNA가 있어서인지 조선 수군 역시 철저한 원거리 전투를 기본 전략으로 하였다. 이승식(移乘式) 전투라는 철저한 근접 전투를 지향하는 왜군과 철저한 원거리 전투를 지향하는 조선 수군의 싸움은 그야말로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이저의 복싱 대결과 같은 방식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달라붙는 왜군에 대해 조선 수군은 왜군을 뿌리치면서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잽을 날리며 상대방에게 대지지가 쌓였을 때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리는 방식으로 전투는 전개되었을 것이다. 


조선 수군이 원거리 전투를 지향하다보니 원거리 무기가 발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조선의 원거리 무기라면 단연 화포이다. 화포는 현대의 대포라 하면 이해가 쉬울 것인데, 요즘의 대포와는 달리 탄환이 적진으로 날아가서 폭발하지는 않는다. 이 시대에는 아직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날아가서 폭발하는 대포는 개발되지 못하였다. 조선 수군은 화포를 이용하여 쇳덩이나 돌, 대형 화살, 쇳조각 등을 발사하였다고 한다.


총통은 규격에 따라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으로 나뉜다. 이 외에 승자총통이 있는데, 승자총통은 대포라기보다는 개인화기이다. 천자총통은 구경이 12.8센티, 지자총통은 10.5센티, 현자총통은 6.5센티, 황자총통은 4.0센티라 한다. 그러니까 쉽게 설명하자면 천자총통은 큰 배(梨)만한 탄환을, 지자총통은 소프트볼만 한 탄환을, 현자총통은 야구공(지름 7.5센티) 보다 조금 작은 탄환을, 황자총통은 골프공보다 조금 작은 탄환을 날린다고 보면 된다. 영화나 만화에서는 축구공이나 수박만한 크기의 탄환을 날리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조선 수군에는 그런 대구경의 총통은 없었다.

조선의 화포들

천자총통은 대구경의 대포인 만큼 소요되는 화약 량도 엄청나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천자총통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수군의 경우 현자총통이 주 무기였던 듯하다. 대형 판옥선의 경우 24문 이상의 화포를 탑재할 수 있었는데, 대부분이 현자총통이고 지자총통이 가끔 섞여 있는 정도였던 듯하다. 


그럼 총통의 사정거리는 어느 정도였을까? 최대 사거리는 거의 1킬로 가까이 되지만 유효 사거리는 200-500미터 정도라 한다. 해군에서 천자총통을 복원하여 발사시험을 한 결과 400미터 정도를 날아갔다고 한다. 일본의 기록에는 120미터 정도라고 나온다. 일본 기록은 아마 최대 비거리를 말한 게 아니라 자신들이 조선군으로부터 포격을 받은 최장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왜군이 보는 앞에서 조선 수군이 일부러 화포를 최장거리로 쏠 이유가 없을테니까...


총통도 다른 원거리 무기와 마찬가지로 최대 사거리가 아니라 유효 사거리가 중요하다. 그럼 유효 사거리가 어느 정도였을까? 일본의 기록에서 총통의 최대 사거리가 120미터 정도라고 했으니 아마 그 정도 거리에서 최초 포격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거리보다 명중률과 그 파괴력일 것이다. 100미터 정도 거리에서 일본의 주력 전투함인 세키부네에 총통을 쏘았다 했을 때 명중률이 몇 퍼센트 정도였을까? 그 당시 정밀하지 못한 대포, 또 파도에 흔들리는 배에서 발포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명중률은 아마 거의 제로에 가까웠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야구공보다 조금 작은 쇠공이 100미터를 날아가서 길이가 20미터 정도 되는 왜선을 적중시켰다 할 때 그 파괴력이 어느 정도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그다지 큰 타격을 줄 것 같지는 않다. 


화포의 정확도와 위력은 적과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크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론적으로 거리가 1/2로 줄어들면 명중률은 4배가 되는데, 실제로는 화포의 탄도의 불안정성을 고려한다면 그보다도 훨씬 높아질 것이다. 적선과 거리가 10-20미터 정도라면 대충 쏘아도 모두 맞을 정도로 명중률은 엄청 높을 것이고, 거의 직사로 발사할 것이므로 적의 선체에도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왜군과 전투 시에 우리의 화포는 적선에 아주 근접해서 이용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왜 수군의 작전은 조선의 배에 갈고리를 걸어 배를 접착시킨 후 배에 올라타 백병전을 벌이는 방식이므로, 우리 수군이 가만히 있더라도 적의 배는 무조건 달려든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수군은 달려드는 적선을 뿌리치면서 가까운 거리에서 화포로 적의 배를 격파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화포 공격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하는 화포는 적의 배에는 큰 타격을 주겠지만, 적병을 살상하는데 에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현자총통의 파괴력이 크다고 하더라도 폭발하는 탄환이 아니기 때문에 적병에 명중시키더라도 1발로는 1명의 적병밖에 쓰러트리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근접한 거리에서는 화포에 탄환 대신에 쇳조각을 넣어 발사하는 방식도 많이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마치 산탄총과 같이 한 발의 발사로 여러 명의 적병을 쓰러트리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의문은 남는다. 옥포해전이나 한산도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수많은 적의 배를 완파하고 격침시켰으며, 불타는 적의 배에서 나오는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고 하였다. 비록 가까운 거리에서 화포를 쏘았다 하더라도 야구공보다도 작은 탄환을 몇 개 맞고 길이가 20미터가 넘는 배가 쉽게 파괴되고 불타 가라앉겠는가? 화포를 맞아 혼란 상태에 빠진 왜선을 향해 조선군은 불화살을 퍼부었겠지만 불화살로 쉽게 배를 불사를 수 있었을까? 조선 수군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적선에 뛰어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면 어떤 결정적인 한 방을 이용하여 왜의 전투선을 수장시킬 수 있었을까?


재미있는 기록을 하나 발견하였다. 한산도대첩에서 패전한 적군 대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남긴 기록이다. 그는 “우리 배가 적의 화포 공격을 받아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적들은 우리 배에 ‘호로쿠비야’를 던져 넣어 배를 파괴시켰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럼 적장 와키자카가 말한 ‘호로쿠비야’란 무엇인가? 호로쿠비야(焙烙火矢)는 단지와 같은 질그릇에 화약을 채워넣고 심지에 불을 붙여 던지는 일종의 수류탄 혹은 던지는 소이탄과 같은 무기이다. 화공을 하는데 아주 유리하며, 또 화약에다 쇳조각 등을 섞을 경우 인명 살상력도 높일 수 있다. 이 무기는 일본의 해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럼 조선 수군도 이 호로쿠비야를 보유하고 있었는가? 아마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고려말 최무선이 발명하였다는 ‘화포’이다. 최무선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화약을 발명한 사람이다. 화약을 이용하여 ‘화포’를 만들어 왜구를 퇴치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하는데, 최무선이 발명하였다는 ‘화포’란 것이 어떤 것일까? 화포(火砲)란 말에서 연상되듯이 대포와 같은 것일까? 그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한 사람이 화약을 발명한 이후 대포까지 발명하였다는 것은 “발명의 속도”로는 너무 빠르다. 이러한 기술혁신이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일본의 호로쿠비야(焙烙火矢)

기록(태조실록)에 따르면 “1388년 왜구가 전라도 진포에 침입하자 도원수 심덕부는 부원수 최무선을 대동하여 화구(火具)를 싣고 곧장 진포에 이르렀다. 왜구는 배를 한곳에 모아 힘껏 싸우려 하였고, 무선이 화포를 쏘아 그 배를 다 태워버렸다.”라고 한다. 그럼 최무선은 화포(대포)를 쏘아 왜구의 배를 모두 불태웠는가? 아니다. 적의 배를 불태우기 위해서는 폭발하는 포탄이 필요한데, 그 때는 그런 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면 최무선은 무엇을 어떻게 발사하였는가? 그럼 최무선의 활약을 서술한 원문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寇不意有火藥, 聚船相維, 欲盡力拒戰, 茂宣發火具盡燒其船.”

“왜구는 화약이 있는지 몰라 배를 한 곳에 모아 전력으로 대항하고자 하였다. 무선이 화구(火具)를 발(發)하여 그 배들을 다 태워 버렸다.”

라고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발’(發)이라는 글자의 해석이 중요한데, 대포를 쏘았다는 말이 아니라 화약(火具)을 어떤 수단으로든 날려 보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전쟁사가들의 말을 빌리면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火砲)란 대포가 아니라 화약으로 만든 폭발성을 가진 용기(用器)와 같은 것이라 한다. 즉 항아리 같은 용기에 화약을 채워넣고 심지를 붙여 폭발시키는 것으로, 이것을 도구나 사람의 손으로 적진에 던져 넣었다고 한다. 이 시기의 기술로는 도화선에 불을 붙인 화구(火具)가 언제 폭발할지 몰라 다루기가 아주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화구를 던지는 임무는 서로 맡지 않으려고 기피했다고 한다. 


이렇게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혹은 화구)가 이후 조선 수군에서도 계승, 발전되어, 해전에 있어 적선에 마지막으로 결정적 타격을 가하는 무기로 활용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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