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의 세상 무진(霧津)에서의 짧은 사랑
소설가 김승옥은 1960-70년대에 많은 작품을 쓴 작가로서, 그의 대표작은 단연 단편소설인 <무진기행>(霧津紀行)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안개>는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작품으로서, 1967년에 제작되었다. 영화 <안개>는 그럭저럭 흥행실적을 기록하였으나, 그보다는 이 영화의 주제가인 노래 <안개>가 대히트를 쳤다. 정훈희가 부른 <안개>는 1960년대 후반을 수놓은 명곡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서른넷의 나이로 장인이 경영하는 회사의 상무로 있는 ‘나’(신성일 분)는 곧 전무 승진을 앞두고 있다. 장인은 전무 승진이 좀 무리한 인사로 손을 써야 할 부분이 있으므로 며칠간 휴가를 얻어 회사를 떠나 있으라 한다. 나는 곧 나의 고향이자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무진으로 여행을 떠난다.
고향에 도착하자 나는 중학교 후배 ‘박’과 동창이면서 고등고시를 패스하여 그 지역의 세무서장이 된 ‘조’를 만난다. 중학교 때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박은 내가 존경하는 후배였는데, 속물화되고 비굴해진 것 같아 마음이 언짢다. 조는 세무서장이라는 자리를 이용하여 지역 유지로 행세하고 있다. 이들과 함께 나는 중학교 음악교사인 하인숙(윤정희 분)을 만난다. 이렇게 만난 나와 박, 조, 그리고 하인숙은 어울려 술집을 가는 등 함께 논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했다는 하인숙은 나를 포함한 세 남자와 만나 술집에 가서는 젓가락을 두드리며 유행가를 부르곤 한다. 박과 조는 호시탐탐 하인숙의 몸을 노리고 있다. 그렇지만 하인숙도 쉽게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진 않는다. 나는 조에게 하인숙과의 관계를 물어보았는데, 조는 그녀와 깊게 사귈 생각은 조금도 없으며 그저 잠시 동안의 즐길 상대로 밖에 생각지 않는다는 대답을 듣는다. 박이나 조에게는 하인숙이란 여자는 아무 변화도 없는 무진이라는 이 외떨어진 지방에서 무료함을 달랠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인숙은 무진에서의 생활에 지쳤다. 그녀는 매일매일 안개밖에 없는 이곳 무진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으며, 어떤 기회를 잡아서든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그녀는 서울에서 내려 온 회사 임원인 나를 무진을 탈출할 끈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급속도로 내가 다가온다. 나도 하인숙에 점점 마음이 끌린다. 그리고 마침내 하인숙과 정사를 가지며, 그녀를 꼭 서울로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러나 곧 나는 아내로부터 전무로의 승진이 확정되었으니 빨리 서울로 돌아오라는 전보를 받는다. 하인숙과 사랑을 다짐했던 나는 아내의 전보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하인숙과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을 안고 서둘러 서울로 올라간다.
나에게 있어 회사와 아내는 현실이며, 무진은 일시적인 마음의 안식을 위해 찾아간 몽환의 세계이다. 그런 세계에서 어느 여성을 만나고 사랑을 약속했지만, 아내의 전보라는 현실의 메시지를 받고는 쉽게 그 몽환의 세계를 벗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