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1a) 프놈펜 시내 관광-투얼 슬렝 대학살 박물관
프놈펜에서는 2박을 할 예정이다. 그래서 온전히 하루를 보내는 날은 오늘뿐이다. 여행을 시작한 후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 이곳이 한국에 비해 2시간 늦은 이유도 있을 것이고, 또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걷다 보면 몸이 피곤해 일찍 잠드는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 있을 때에는 오전은 그냥 보내고 오후에 들어서 활동을 하고 했는데, 여행을 시작한 후는 하루를 풀로 사용하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하루가 매우 길다.
1980년대 초 무렵이라 생각된다. 어느 날 갑자기 도하 모든 신문 지면이 킬링필드 사건으로 도배를 했다.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 공산정권이 200만 명에 이르는 자국 국민을 학살했다는 것이었다. 그 학살의 방법도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가장 흔히 사용된 방법이 양손을 묶은 사람에게 비닐봉지를 씌워 질식사시키는 방법이었다. 나는 처음 그 기사들을 보고 믿지 않았다. 당시 전두환 독재정권이 자신들에 대한 사회적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가짜 뉴스를 조작한 걸로 생각했다. 그러나 타임지를 비롯한 외신들의 연이은 보도로 이 사건이 사실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킬링필드는 1980년대 초에 들어 세계에 알려졌지만, 사실 그 사건이 벌어진 것은 1970년대 후반이다. 이 사건이 백일천하에 드러난 때는 이미 그 책임자인 폴 포트와 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 정권이 몰락한 뒤였다. 킬링필드의 잔해는 지금도 캄보디아 곳곳에 남아있다.
오전에 <투얼 슬랭 대학살 박물관>에 갔다. 이곳은 킬링필드 시절 프놈펜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감옥이다. S21이라 불린 이 감옥에는 수만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이 투옥되어 악랄하기 그지없는 고문을 받으며 죽어갔다. 그들은 정치범도 아니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끌려와서는 인간의 짓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받은 끝에 그로 인해 죽거나 처형되었다. 해설자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체포되었다는 그 자체가 죄라는 것이었다.
박물관은 'ㅁ' 자 형태로 되어있고 가운데는 운동장이다. 알고 보니 원래는 이곳이 학교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다녔던 초등학교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 가까운 곳에는 그네 틀도 있고 철봉대도 있다. 아이들의 놀이 도구인 이것들이 모두 참혹한 고문대로 악용되었다. 그리고 교실은 감방과 고문실 등으로 사용되었다. 전시관에는 킬링필드의 폴 포트를 비롯한 책임자들의 사진과 함께 이곳에서 죽어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고문에 사용된 끔찍한 도구들, 그리고 이를 묘사한 그림들도 전시되어 있다.
그럼 킬링필드를 자행한 인간들은 어떤 자들인가? 지도자 폴 포트를 비롯한 지도부는 대부분 프랑스에 유학한 그 당시 캄보디아인으로서는 최고 엘리트들이었다. 이인자인 키우 삼판은 그 어렵다는 프랑스의 경제학 박사였다. 그럼 이들을 따랐던 크메르 루주 군은 주로 어떤 출신이었나? 대부분 세상 물정을 모르는 깡촌의 소년과 젊은이들이었다. 좋은 말로 하자면 아주 순진하고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그 사회 최고의 학식을 가진 엘리트와 가장 순진한 젊은이들이 만나 그들은 악마가 되어 이렇게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것이다.
그럼 20세기 후반 인류 최악의 범죄라 할 킬링필드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크메르 루주 정권과 그 수괴인 폴 포트이다. 그렇지만 미국의 책임도 그냥 넘길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당초 캄보디아는 왕이 통치를 하는 왕정국가였다. 그런데 베트남 전쟁 중에 미국은 자신들과 거리를 두려는 시아누크 왕을 제거하기 위해 쿠데타를 부추겼고, 쿠데타의 결과 미국의 괴뢰 정권이라 할 론놀 정권이 수립되었다.
론놀 정권의 독재와 폭정, 그리고 부패로 얼룩졌다. 이러한 론놀 정권의 폭정과 부패로 인해 민심은 론놀 정부와 그를 지지하는 미국으로부터 급속히 이반 되었고, 이것은 바로 크메르 루주에 대한 지지로 옮겨젔다. 게다가 베트남 전의 패전으로 미국이 인도차이나를 떠나자 크메르 루주는 손 쉼 게 론놀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정권을 수립하였다.
정권을 잡은 크메르 루주는 광란의 피의 파티를 벌였다. 폴 포트를 비롯한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는 “진정한 공산사회”라는 판타지를 꿈꾸었다. 그들은 이상적인 공산사회를 만들기 위해 진력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그들의 발목을 잡는 수없이 많은 현실적인 문제가 등장한 것이다. 그들이 지향하는 목적에 차질이 생기자 그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말목을 잡는 사람들의 탓으로 돌렸고, 그들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크메르의 킬링필드를 보면서 연상되는 사건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이야말로 피와 광란의 축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혁명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단두대로 끌고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지향하는 “혁명”의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지 않자 혁명세력 내부에서 피로 점철된 처절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혁명의 최고 리더였던 로베스 삐에르마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수없이 많은 희생 위에서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 정신으로 프랑스를 새로운 길로 인도하였다. 그렇지만 킬링필드는 그 희생은 프랑스 대혁명에 비해 훨씬 컸지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