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를 둘러싼 형제의 갈등을 그린 한국 영화의 걸작
오랜만에 오래된 한국영화를 감상하였다. 최은희가 주인공 역을 맡은 <지옥화>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주한 미군을 상대로 윤락을 하는 ‘양공주’들이 적지 않았다. 그 당시 가난했던 우리 형편에서 진귀한 미군 물품을 펑펑 쓰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던 그녀들이었지만, 사람들로부터는 지극히 멸시를 받았다. 양공주란 말도 나중에 들어서 사용하던 말이었고, 내가 중학교 다닐 때인 1960년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녀들을 ‘양갈보’라 부르며 멸시했다.
1960년대 말 내가 다닌 중학교는 미 8군 사령부와 정문을 마주하고 있었다. 오후 5시 퇴근시간이 가까워지면 미군 부대 앞에는 노출이 심한 짧은 치마를 입은 양공주들이 몰려들어 퇴근하는 미군들을 기다리곤 하였다. 나는 중학교 3년 동안 매일 그런 모습을 지켜보았다. 영화 <지옥화>는 양공주와 그녀들 주위에서 얹혀사는 남자들의 이야기로서 1958년에 제작되었다.
동식은 서울에 물건을 사러 간다고 고향집에서 돈을 들고나간 뒤 소식이 없는 형을 찾아 서울에 왔다. 그런데 서울 역 앞에서 소매치기에게 가져온 돈과 짐을 모두 털리고 어쩔 줄을 모르고 시내를 방황하게 된다.
소냐(최은희 분)는 양공주이다. 그녀는 뛰어난 미모와 세련된 미모로 미군을 꼬이며, 그에게 흑심을 품은 깡패들도 요령 있게 잘 처리한다. 동식의 형 영식은 서울에 왔다가 소냐를 만나 지금은 기둥서방 비슷하게 그녀 주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영식은 진정으로 소냐를 좋아한다.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제의하지만, 소냐는 돈을 더 벌어야 한다며 거절한다.
동대문 근처에서 동식은 우연히 영식을 만났다. 영식은 놀라 도망가지만, 동식이 뒤따라가 결국 동식은 영식과 함께 살게 된다. 동식은 형 영식에게 함께 고향에 돌아가서 어머니와 함께 살자고 애원을 하지만 영식은 돈을 벌어 내려가겠다며 거절한다. 소냐는 순박한 청년 동식을 보고 장난 반 진심 반으로 그를 유혹한다. 동식은 그런 소냐를 거부하지만 조금씩 마음이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동식은 양공주 생활을 하고 있는 주디를 알게 된다. 주디는 순진한 처녀였지만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길을 택한 것이다. 비록 양공주 생활을 하지만 주디는 더없이 순박한 아가씨이다. 주디는 동식을 좋아한다. 그리고 동식에게 결혼해주면 함께 고향으로 가겠다고 한다. 그렇지만 동식의 마음 한편에는 소냐가 있다.
소냐는 계속 동식을 유혹한다. 동식은 마침내 그 유혹에 넘어가 함께 한강 유원지로 놀러 간다. 뒤늦게 소냐와 동식 사이의 관계를 알게 된 영식은 둘을 찾아 한강 유원지로 가고, 그곳에서 함께 있는 동식과 소냐를 발견하고, 그 둘에게 심한 폭행을 가한다. 이 일로 인해 소냐의 마음은 영식으로부터 완전히 떠난다. 이제 소냐에게 있어서 영식은 동식과의 사랑에 방해물일 뿐이다.
영식과 그 패거리들은 한탕 큰 것을 노리고 있다. 바로 미군 물자를 빼돌리는 것이다. 대담하게 미군 군수물자 운송 화물기차를 털 계획을 세운다. 동식은 여전히 형 영식과 소냐가 잘 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소냐는 동식에게 더욱 적극적이다. 영식은 패거리들과 함께 미군 수송 열차를 터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안 소냐가 동식과의 사랑의 방해물이 된 영식을 제거하기 위해 이 사실을 헌병대에 알린다. 곧바로 출동한 헌병들은 영식 패거리들을 추격하기 시작하고, 결국 영식은 총상을 입은 채 강변 진흙탕에 숨어있다.
형이 쫓기고 있는 것을 안 동식은 소냐와 함께 형을 찾아 나서 결국 부상당한 채 숨어있는 영식을 발견한다. 소냐는 동식에게 영식을 두고 함께 떠나자고 하지만 동식은 그럴 수가 없다면서 형을 옮길 차를 구하러 자리를 뜬다. 이 모습을 숨어 보고 있던 영식은 이 일을 신고한 것이 소냐이며, 동식과 함께 하기 위해 방해꾼인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그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식은 몸을 피하는 소냐를 따라가 칼로 찌른다. 그리고 사랑했던 그녀의 곁에서 쓰러진다.
동식은 이제 혼자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시골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주디가 먹을 것을 사들고 와 그에게 건네준다. 동식은 주디에게 함께 고향에 가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주디는 두 말 않고 그의 말을 따른다. 동식과 주디는 덜컹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새희망에 들뜬다.
옛 한국 영화로서는 오랜만에 보는 뛰어난 작품이다. 스토리도 아주 훌륭하며, 배우들 특히 최은희의 연기는 만점에 가깝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 가운데 아는 사람은 최은희 한 명뿐이다. 최은희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재미이다. 이 영화에서 최은희가 한강 유원지에서 수영복을 입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지금이야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노출이었을 것이다. 이 장면은 당시 많은 남자들이 가슴을 설레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