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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Dec 25. 2022

역방향 기차에 오른 듯

나이를 긍정하기

나이 먹을수록 사진 장수만 늘어난다. 수없이 찍어도 도무지 맘에 드는 사진이 없다. 보정앱으로 찍은 건 너무 인위적이라 싫고 기본 카메라는 너무 솔직해서 무섭다. 자연스러운 주름살이 아름답다는 말은 주름살이 없는 이가 할 수 있는 말이고 나이 먹어서 마르면 초라해 보인다는 말도 적당히 마른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라는 말은 ‘적당히 가려야 예쁘다. 나도 그렇다’로 바뀐 지 이미 오래. 미의 평준화에 도달한다는 나이를 앞두고 있지만 가져본 적 없는 매력을 여전히 갈망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성이나 인품 말고 확연히 보이는 아름다움을 부러워하는 건 죽고 나서나 포기할 수 있는 걸까.


애슈턴 애플화이트는 <나는 에이지즘에 반대한다>라는 책에서 젊어 보인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차별이라고 하면서 ‘젊음은 좋고, 늙음은 나쁘다’는 식의 나이 불평등을 부추겨 젊음에 집착하도록 만든다고 했다. 정희진 작가는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에서 “사람들은 노화를 의식하면서 자기혐오와 싸우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겐 안도감과 우월감을 느낀다.”면서 나이 듦은 타인의 시선을 내재화한 자기감정이라고 일갈하기도 한다. 이런 글들이 나를 얼마나 깨웠는지 모른다. 문장마다 곱씹으며 얼마나 큰 공감을 보냈던가. 하지만 이런 문장을 통해 잠시나마 나이를 긍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여전히 내 나이를 부끄러워한다. 어떻게든 나이의 흔적은 감추고만 싶은 것이 된다.      


하지만 나의 욕망은 아랑곳하지 않고 세월은 공평하게 나에게 머물렀다. 상태의 쇠락이 가팔라질수록 현재를 유지하고픈 욕망도 커져가는 법. 주름 잡티로 가득한 셀카에 실망할수록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는 원거리 샷이 늘어났다. 그러다 이젠 그것도 안 되겠다 싶은 순간이 오자, 나를 뒤 돌아 세우기 시작했다. 막상 찍어보니 뒷모습에도 표정이 있는지 사진들은 교묘하게 나를 감추면서도 나를 드러냈다. 내 사진첩은 곧 뒷모습으로 가득 찼고 sns 속 일상 모습에서도 내 얼굴은 자취를 감췄다. 노화를 이유로 사진 속에서 스스로를 퇴출시켜버린 셈이 되었다.      


가져본 적도 없는 미(美)의 세계를 포기하지 못해서 얼마 전엔 그림자 사진을 담아 업로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웬디에게 그림자를 맡긴 피터팬이라도 되고 싶었던 걸까. 더 슬픈 건 그림자에 쏟아진 칭찬. 나처럼 다른 이의 시선에 민감한 사람에겐 치명적인 단맛이었다. 하지만 욕망을 잔뜩 끌어안고 있어도 세월의 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나이 드는 것을 자연의 당연한 이치라고 말은 하면서도 ‘늙음’이 가져오는 나의 변화엔 일일이 반응했다. 신체의 변화와 자주 놓치고 마는 자신감 앞에서 온갖 고정관념과 편견을 다시 학습하듯 되새겼다. 이제는 나이 먹지 않은 척이나 쌩쌩한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내심 여유를 만들기도 했지만 그 마음에 숨은 체념의 뉘앙스는 나를 슬프게 했다. 나이가 든다는 건 계속해서 뭔가를 잃는 거라는데, 손가락 사이로 술술 빠지는 머리카락처럼 모든 일에서 자신감이 사라졌다. 그것은 비단 외모의 쇠락만은 아니었다. ‘제3의 성’이라는 아줌마를 거쳐 무성에 가까운 나이가 된다는 데 반가울 리 없지 않은가.      


그렇게 자신감을 뚝뚝 흘리고 다니던 어느 한낮. 습관처럼 켜둔 TV에서 2020 도쿄올림픽 탁구경기를 보게 됐다. 우리나라 국가대표 신유빈 선수와 룩셈부르크 니시아리안 선수의 경기였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데도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확연하게 보였다. 경기 해설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신유빈 선수는 17세, 니시아리안 선수는 58세로 이번이 다섯 번째 참가하는 올림픽이라고 했다. 엄마뻘이라고 하기도 뭣한 어마어마한 나이 차이였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라 우리나라의 탁구신동 신유빈 선수를 응원했지만 마음 한편에선 니시아리안 선수의 선전도 자꾸 기대됐다. 많은 이의 예상대로 신유빈 선수는 젊은 선수 특유의 센스와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니시아리안 선수는 밀리지 않았다. 이따금 지친 기색이 보였지만 공 하나하나에 쏟는 집중력이 대단했다. 주거니 받거니 아슬아슬한 경기 끝에 세트스토어 4-3으로 신유빈 선수가 승리를 거두었다. 니시아리안 선수는 엄연한 ‘패’였다. 하지만 경기 내용을 봤을 때 졌다고 단정 짓기 어려울 만큼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보다 더 근사했던 건 경기를 마치고 남긴 인터뷰였다.


 “오늘의 나는 내일보다 젊습니다. 계속 도전하세요. 즐기면서 하는 것도 잊지 말고요.”


이 언니, 어쩌자고 이렇게 멋진가.

니시아리안 언니의 말대로 내 시간의 방향도 돌려보았다. 역방향 기차에 오른 것처럼 살아갈 날을 향하던 시선을 살아온 날로 전환시켰다. 그러자 가장 나이 들었다고 생각한 오늘은 가장 젊은 날이 되었다. 인생의 수직선 위에선 똑같은 날도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었던 거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말했다. “우리가 노화 탓으로 돌리는 많은 결점은 사실 인성의 문제다. 노화는 새로운 성격 특성을 만들어낸다기보다는 기존의 특성을 더욱 증폭한다. 우리는 나이 들수록 더 강렬한 형태의 자기 자신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보통 긍정적이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역방향 기차에 오른 것은 얼마나 참신한 일인가. 나이의 방향을 뒤집어 생각하듯 내가 가진 부정적인 특성을 희석시키는 노력은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역방향 기차에서 달음박질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얼마 전 커피 인문학 강의를 듣다가 커피나무 사진을 보았다. 다섯 갈래로 나뉜 희고 작은 꽃들이 줄기에 오밀조밀 매달려있었다. 그 사진을 보던 강사님이 우리에게 질문했다. “이 사진에서 이상한 거 없으세요?” 어려운 질문을 받은 듯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자 강사님이 이어 말했다. “여기 보시면 꽃 주변에 붉은 커피열매가 보이시죠? 커피는 한 줄기에서도 성장이 다르게 진행됩니다. 꽃과 열매가 저마다의 속도로 익어가요. 그래서 보통 1년에 4번 열매를 수확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한 사람의 인생 역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도 커피나무처럼 저마다 다른 성장과 결실을 맺기 때문이다. 그 시간성 덕분에 평생에 걸쳐 여러 번 수확을 거둘 수 있다. 그러니 어떤 나이 든 긍정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것은 축복이기도 했다. 커피를 향한 인류의 사랑은 그런 동질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뜬금없는 생각도 잠시 스쳤다.


우리는 같은 시간 속에 있지만 각자 갖고 있는 시간의 절댓값은 다르다. 분침과 시침의 속도는 저마다 제각각으로 흐르며 언제 멈출지도 알 수 없다. 때로 젊은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난 지인들을 떠올리며 그들이 닿지 못한 반환점을 대신 터치하는 심경이 된다. 나의 오늘은 어제 죽은 누군가가 간절히 바라던 내일이라는 시구가 아니어도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장차 할머니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수많은 행운의 결과임을 안다.  나이를 긍정하는 것은 이제껏 성실하게 살아온 나 자신을 긍정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는 이유이다. 늙음을 부정하고 피하려고 도망치는 한 내 나이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더욱 멀어진다. 유안진 시인은 그의 시 <이래도 젊고 싶냐>를 통해 팔십이 된 지금의 평온과 젊은 날의 초조함을 바꾸고 싶지 않은 마음을 그려냈다. 시인처럼 나도 안도감을 느낀다. 매우 자주. 치열했던 그 시절은 한 번이면 족한 것이다.


이따금 1년 전에 찍은 사진을 보며 이땐 아직 팽팽했네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그 사진을 찍은 날에도 이젠 사진 따위 찍고 싶은 않다며 툴툴거렸다. 사람 마음이란 그런 법이다. 그러니 나이 듦은 감정이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의 나이 듦에 주목하기보다 오늘의 젊음에 집중하는 것. 그것만이 오늘의 행복을 뺏기지 않는 유일한 방법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 듦은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어제 되던 것이 오늘 안 되어 의기소침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땐 어제까지 가능했던 것에 감사한다. 빠져나가는 가능성을 나이 먹는 세금이라 여기며 기꺼이 껴안아본다. 팔자주름을 겁내지 말고 자주 미소 지어 이왕에 생길 주름이라면 웃음이 지나는 자리마다 고랑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방황 끝에 맞이한 이 시간의 평안은 얼마나 안락한가. 어떤 사람으로 무르익어 내 삶을 완결시킬지 비로소 깊이 사유할 수 있는 이 시간. 그렇게 가장 젊은 오늘을 제대로 다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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