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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Dec 28. 2022

헤맬 수 있는 자유

<행복의 가격>을 읽고



엊그제 백화점에 갔다가 마음에 드는 코트가 있어서 입어봤다. 가격을 여쭈니 280만 원이라며 선심 쓰듯 240만 원까지 깎아(?) 준다고 했다. 그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살 수 있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다가 나왔다. 어려서부터 물욕이 없었던 나는 나이 먹을수록 이래도 되나 싶게 갖고 싶은 게 없다. 까다로운 성정 때문인지 마음에 드는 걸 만나기도 매우 어렵다. 올해만 해도 나를 위해 산 의류와 잡화는 다섯 손가락을 넘지 않는다. 관심도 적어진 데다 이젠 뭘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으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게다가 보는 눈만 높아져서 좀 괜찮네 싶으면 범접할 수 없는 금액이 나를 반긴다.  <눈감지 마라>에 나온 정용이랑 진만이는 하루 8-9시간 일해야 180만 원을 버는데 두 번째 입어본 코트는 290이란다. 지저스....


<행복의 가격>은 2020년에 7 꼭지까지 읽고 너무 재미있어서 리뷰를 남겼었는데 다른 책에 밀려 책탑을 전전하다 올여름에서야 완독 했다. 2년 전에 읽은 앞부분 7 꼭지가 가물가물해서 다시 읽었는데 그때 느낀 재미보다 덜해서 좀 의아했다. 책과 독자가 만나는 시점과 상황엔 알 수 없는 비밀 같은 게 숨어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도 역시는 역시. 가쿠다 미쓰요의 천연덕스러운 문장에 곧 빠져서 즐겁게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즈음 나도 내 행복의 가격을 결제하게 된다.      


가족들과 대전에 가는 길이었다. 지하철에 올랐고 딸과 나는 빈자리를 찾아 서성이다 좀 떨어져 앉았다. 몇 개의 역을 지나쳤을 즈음 시야 저쪽에서 딸이 손짓을 했다. 옆자리가 비었으니 얼른 오라는 신호였다. 재빠르게 옆에 가서 앉자 딸이 웃으며 말했다. “내 옆에 앉았던 아저씨가 일어나면서 ‘친구분이랑 같이 앉으세요’ 이러더라?”


아저씨의 침침한 눈동자에 건배를!!


내 민낯을 너무 잘 아는 딸은 터무니없다는 듯 그 말을 넘겼지만 나는 왠지 신이 나서 여행 내내 자주 웃었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온 날 밤엔 유명 배우가 광고하는 단백질 앰플을 주문했다. 7병에 149000원. 쿠폰과 포인트를 끌어모아 127000원에 결제했으니 한 병에 18000원대. 써보고 괜찮으면 여기저기 한 병씩 나눠주는 행복까지 담겼으니 꽤 괜찮은 가격 아닌가.      


며칠 전 나이를 긍정한다는 글을 썼던 게 문득 떠오르면서 젊어 보인다는 말에 기분 좋아지는 건 또 뭔가 싶다. ‘젊어 보인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차별이다’(애슈턴 애플화이트) ‘사람들은 노화를 의식하면서 자기혐오와 싸운다’(정희진)는 문장까지 인용했으면서 남의 착각에 내 맘대로 흐뭇해하다니. 잠시 걸쳐 본 280만 원 코트와 잠시 누렸던 흐뭇함 뒤로 부끄러움인지 죄책감인지 알 수 없는 불편한 마음이 몰려온다.


그러다 “중국차가 뭣 때문에 바디크림 안에 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화 방지’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어쨌든 노화는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P54)라고 말하는 가쿠타 미쓰요의 천진함에 풋 웃음이 난다. 그제야 스스로 감정을 통제하려 했다는 걸 깨닫는다. 나이를 긍정하는 것은 젊음을 비하하는 것도, 노화를 혐오하거나 미화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감정에게 그 사이를 마음껏 헤맬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는 게 아닐까,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쿠다미쓰요#시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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