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희 Jan 09. 2023

주기율표에서 시를 만나다

<주기율표>를 읽고



읽는 동안 좋은 와인이 떠올랐다. 알아채는 사람에게만 허락하는 깊고 오묘한 와인의 맛과 향처럼 이 책 역시 인간과 물질과 세상에 대한 웅숭깊은 이해를 담고 있다. 하지만 달달한 모스카토 정도만 겨우 즐기는 내가 와인의 세계에 가닿지 못하듯 이 책에 담긴 원소와 화학실험은 좀처럼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 다른 세계 같았다. ‘희유가스’ ‘브로모벤젠’, ‘아르투시의 조리법’은 다 무어냐. 그뿐인가, 첫 장부터 선조들의 성씨를 설명하느라 메밀랴노/몽멜리앙, 바르바이오투/바르바무이신 등의 히브리어가 속출한다. ‘과연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수없이 스스로를 의심했고 ‘이걸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눈으로만 읽는 찝찝한 기분에 시달렸다.  

    

하지만 좋은 와인이 그렇듯 알 수 없는 매력은 나를 자꾸 끌어당겼고 좀처럼 이 책을 놓지 못하게 했다. 파노라마처럼 그려지는 작가의 인생과 만남, 그의 삶을 지배한 역사적 사건의 비애를 읽다 보면 자극받은 뇌가 긴장에 휩싸였다. 원소에 얽힌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는 원소 하나하나에 고유의 인격을 부여했고 우아한 문체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물론 술술 읽히는 글은 아니다. 지극히 문과 편향 학습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프리모 레비의 이과적인 재치과 유머를 꽤나 많이 놓쳤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와 상황에 맞닥뜨려도 일단은 ‘미루어 짐작하기’로 때우며 근근이 버티다 보면 대부분의 좋은 책이 그렇듯 특별한 순간을 선사한다.


몰이해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그때가 되면 씨줄과 날줄처럼 작가의 인생과 원소와 언급된 지인들이 엮이며 새로운 국면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마치 화학반응을 일으키듯 이 책에 빠져버리게 된다. 산드로와의 우정, 줄리아와의 엇갈린 사랑, 뮐러 박사와 나눈 불편한 진실, 보니노를 향한 부러움, 알베르토를 휘감은 비통, 바르바리쿠, 팔리에타, 체라토..... 그리고 마침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내 감방에는 희미한 전등불이 하나 있었는데 밤에도 켜 있었다. 겨우 글씨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빛이 희미했지만 그래도 나는 쉴 새 없이 독서했다. 내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쥐 때문에 남은 거라고는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밖에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이 그 쥐보다 더 쥐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숲 속에 난 길을, 밖에 쌓인 눈을, 서로 구별되지 않는 산들을, 내가 자유의 몸이 되면 돌아가서 할 수 있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일들을 생각했다. 그러면 목이 메어왔다. P 197      


이렇게나 삶에 대한 애착과 희망이 가득했던 사람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무엇이 그를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는지 무겁고 깊은 질문을 놓아두게 된다. 답을 알길 없으니 그의 다른 책을 그저 읽을 수밖에. 책을 통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작가를 느끼며, 어쩌면 삶과 죽음 사이엔 종이 한 장의 간격조차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프리모레비 #이것이인간인가 #화학자 #작가

작가의 이전글 헤맬 수 있는 자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