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마타, 이탈리아>를 읽고
“나이 드는 것에는 꽤나 호의적이면서 ‘늙음’에 대해선 아니었다. 영원히 젊을 줄 알았던 때처럼 나는 나이 들어도 늙지는 않을 거라고 자신하고 있었던 거다. 이번 여행을 계획했던 것도 어쩌면 늙지 않았다는 걸 확인, 또는 증명하고 싶어서였는지 모른다. 나는 내게도 머잖아 닥칠 늙음에 대해 온갖 고정관념과 편견을 가진 채 혐오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시시각각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는 늙음을 부정하고 혐오하면서 어떻게 앞으로 맞을 내 나이를, 나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P142
시칠리아를 둘러보던 작가는 버스 안에서 동네 할머니와 짧은 대화를 나눈다. 먼저 내리게 된 할머니는 배웅하려고 일어선 작가의 등을 말없이 토닥이며 따스한 인사를 전한다. 낯선 곳, 알 수 없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느꼈던 작가의 두려움과 외로움은 이름 모를 할머니의 눈빛과 온기로 녹아내린다. 할머니가 내린 정류장에는 ‘페르마타’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정류장’, ‘잠시 멈춤’이란 뜻이면서 악보의 늘임표를 부르는 단어인 ‘페르마타’(fermata). 본래 박자보다 두세 배 길게 늘여 연주하라는 오선지 위의 이 기호는 바쁜 일상 속에선 사치일지 모른다. 그래서 모른 척 때론 알면서도 무시하며 지나간다. 제대로 쉬어주지 못한 삶의 페르마타는 어느 순간 숨 가쁜 선율이 되어 몰려오고 남은 박자조차 뒤엉킨 채 원곡의 아름다움을 끝내 살리지 못하기도 한다.
예순을 앞둔 작가는 작심이라도 한 듯 오랜 친구와의 긴 여행을 통해 삶의 페르마타를 제대로 연주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탈리아 전역을 걸었고 언어의 장벽 앞에 도전했으며 일이 틀어질 때마다 물러서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아시시’의 짙은 안갯속에서는 내딛는 한 걸음에 길이 허락된다는 희망을 발견하고 ‘볼로냐’의 호텔에서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자신과 타협하기보다 호텔 측의 착오에 대해 끝내 사과와 환불을 받아내는 집념과 성취를 보여 준다.
좋아하는 작가가 펴낸 첫 에세이인 데다 몇 년 전 다녀온 이탈리아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서 단숨에 읽었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이탈리아의 아름다움도 여행의 소중함도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한 개인, 몸과 마음의 반갑지 않은 변화를 인정해나가는 과정, 나이 듦 앞에 위축되지 않는 패기와 명랑한 마음이라 생각했다.
나도 불과 몇 년 전까지는 정류장 몇 개쯤 휙휙 지나쳐도 괜찮은 급행열차에 탔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이사때문에 일이 끊기면서 정류장마다 쉬어가는 완행열차로 환승했다고 여겼다. 주어진 환경에서 일과 일상을 천천히 회복해 나가면 된다고, 정류장마다 바깥 풍경을 감상하며 한적하고 느린 일상에 적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 한 해의 절반쯤을 아픈 상태로 두문불출 지내다 보니 외딴 정류장에 홀로 남아 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는 심정이 되었다.
나이 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면서도 ‘늙음’의 신호탄 같은 신체적 변화와 능력 저하는 별개의 문제로 다가와 나를 괴롭혔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보던 책도 돋보기 없인 안 되고, 매일 아침 새롭게 시작하는 갖가지 통증에 잠이 깨고, 쇼윈도에 비친 낯선 내 모습에 화들짝 놀라는 건 그렇다 쳐도, 모든 일에서 ‘자신감’이라는 필수 영양소가 빠진 건 무척이나 치명적인 일로 작용했다.
30분 달리기에 도전했던 올해 초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거란 생각,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수업을 좀 더 늘려보고 싶다는 마음도 움츠러든지 오래고, 글을 좀 더 써봐야지 싶다가도 ‘누가 기다린다고?’ 하는 암울함이 뿔 달린 악마처럼 기어올라왔다.
마음이 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마음을 지배함을 절실히 느끼고 마는 것이다. 내가 원한 머묾도 아니고 쉽게 떠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지만 이번 정류장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내 안에 고인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과 혐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제 움직여야 한다. 다음 열차가 다가올 때 ‘그 열차에 타겠다’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 곧 다가올 열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저 먼 곳으로 눈길을 보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