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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동사

<우연히, 웨스 앤더슨>을 읽고

by 정희

“사랑은 완벽한 보살핌이라는 ‘상태’가 아닙니다. ‘투쟁’과 같은 적극적인 명사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금 당장 이곳에서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 P30 (피츠버그 체육회의 로저스 아저씨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감독 웨스 앤더슨. 이 책의 저자는 여행 중 웨스 앤더슨의 영화 속 장면과 비슷한 분위기의 사진을 접하게 되어 그 경험을 공유하고자 @accidentallywesanderson 커뮤니티를 개설한다. 이후 140만 명이 넘는 모험가들이 세계 곳곳에서 웨스 앤더슨의 영화와 닮은 사진 수천 장을 보내게 되고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이 책이 만들어진다.


웨스 앤더슨 감독 특유의 색감과 좌우대칭 구도는 보자마자 그를 떠올리게 하고 세계 곳곳의 단정한 아름다움과 적막한 분위기는 사진과 함께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며칠째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가 아니었다면 그저 눈호강 제대로 시켜준 책으로만 기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지하철과 미술관을 본 순간, 그곳의 공기와 햇살의 질감이 너무 실감 나서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그곳에서 일어나는 참담한 파괴가 훅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사진 속 그 평화는, 내가 누구의 방해도 없이 타이핑 치고 있는 이 시간에도 무참히 깨지고 있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가 아니라고 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투쟁이며 받아들이려 애쓰는 동사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서로 사랑하는 것까지 바라진 않는다. 다만 각자의 평화만큼은 침범해선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코로나 19라는 전 세계적 전염병만으론 불행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가.


방송에서 우크라이나 모녀의 사연을 보았다. 오랫동안 모은 돈으로 가게를 개업하는 날 전쟁이 시작됐다고 한다. 폭격으로 깨진 유리창을 쓸어 담는 딸의 뒷모습과 함께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부르는 우크라이나 국가였다. 눈물을 삼키며 '우크라이나 만세'를 작게 읊조리는 그녀의 절망이 너무 마음 아팠다. 사랑이라는 말의 무게를 절감하면 흔하디 흔해진 단어인데도 함부로 쓸 수 없게 된다. 거창한 사랑이 어렵거든, 아무것도 하지 말라. 이 책에 담긴 세계 곳곳이 평화로만 가득하길 소망한다. 물론 러시아도 포함한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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