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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만 개의 이야기

<아트 슈피겔만_쥐>를 읽고

by 정희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오래전부터 홀로코스트에 관심이 많았다. 자연스레 관련 영화와 책을 많이 읽고 보았다. ‘인생은 아름다워’ ‘쉰들러 리스트’ ‘사라의 열쇠’ ‘줄무늬 옷을 입은 소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나의 기억을 보라’ ‘죽음의 수용소에서’ …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내가 기울인 관심만큼 그들의 아픔에 공감한다고 생각했다. 유대민족이 핍박당한 역사와 나치의 만행을 목도하는 것이 희생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애도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막연한 짐작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게 됐다. 그간 내가 읽고 본 작품은 희생자 중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의 목소리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어떤 말도 남기지 못한 희생자의 심정과 고통을 나는 아직 모른다. 600만이란 어마어마한 숫자는 몇 작품 읽고 본 것으로 감히 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작품 또한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블라덱의 이야기이지만 새삼스러울 만큼 희생당한 이들이 선명하게 남았다. 유대인을 쥐로, 나치를 고양이로 그려낸 만화가 그 어떤 작품보다 희생자의 면면을 각인시켰다. 아티의 친척들이 수용소를 피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어둡고 축축한 헛간에서 어떤 두려움에 떨었는지, 화물칸에 함께 실려온 옆 사람이 오물을 쏟고 죽어나가는 모습들이 무섭도록 생생했다.


개개인의 사연과 역사가 또렷해질수록 숫자 속에 감춰진 어마어마한 사건이 제대로 보인다. 600만이란 한 덩어리의 희생이 아니다. 600만이란 숫자 속에는 600만 가지 이상의 아픈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채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수북이 쌓인 유태인의 머리카락 더미를 보면 두려움과 수치심에 떨며 머리카락을 빼앗긴 그들의 얼굴이 겹친다. 가스실에서 나온 아내와 아들의 시신을 발견하고도 마음껏 울지 못하는 남편과 아버지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해보게 된다.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짐승처럼 실려간 기차 화물칸과 뿌연 연기가 흘러나오는 샤워기를 보며 울부짖던 그들의 응답받지 못한 기도가 들려오는 것이다. 그렇게 죽음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 나약함이 희생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에게는 형벌 같은 기억이 남는다. 왼팔뚝에 새겨진 수감번호 문신처럼 죽는 날까지 벗어날 수 없는 악몽이 반복된다. 날로 인색해지고 관계는 뒤틀린다. 그토록 원하던 생을 얻었으나 그들이 원하던 삶을 살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더 두려운 것은 아픔의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영국의 이중 조약, 강대국들 사이의 역학 구도 등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이유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끊이지 않는다. 타고난 인종 때문에 고난을 겪고도 흑인에 대해 인종차별을 하는 블라덱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상기시킨다.


얼마 전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우크라이나에 기부금을 보냈다. 적은 금액이지만 뭔가 큰 일을 한 것 같은,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우쭐함도 잠시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떤 만평을 보았다. 우크라이나에는 관심을 보내면서도 오랜 시간 폭격으로 피해 입은 팔레스타인과 난민에겐 관심 갖지 않는 현상을 꼬집는 내용이었다. 순간 부끄러웠다. 그곳뿐이겠는가. 지금도 세계 곳곳은 총성이 울리고 뜨거운 화염으로 휩싸였을 것이다. 이런 때에 느긋하게 책을 읽고 설익은 글을 남기며 설레는 마음으로 북클럽을 기다려도 되는 것일지 스스로 묻게 된다. 적어도 나는 관심을 가졌으니까, 이런 책을 읽고 그들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수고는 했으니까, 할 만큼 한 것일까.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내가, 우리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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