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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Oct 29. 2022

어휘 수첩

단어 창고에 문 하나 열어뒀을 뿐인데

        

기억력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분명 좋은 쪽이었다. 지인들이 떠올리지 못하는 걸 상기시켜줄 때가 많았고 남다른 예민함 덕분에 많은 기억 조각도 적절하게 꺼내고 저장하는데 능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기억을 꺼내 말로 바꾸기가 어려워졌다. 말하고 싶은 단어 조각이 목구멍과 목젖 사이, 소뇌와 대뇌 사이 어디쯤에 끼어 쉽사리 몸을 보여주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기억력의 차원이 아닌 다른 종류의 아웃풋 오류 같았다. 시작은 외국 배우들 이름이었다. 톰 크루즈나 팀 로빈스 같은 4글자 배우들까지는 쉽게 기억하는 줄 알았는데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 대해 얘기하던 날, 여주인공 이름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짧은 금발 머리와 귀여운 입매, 사랑스러운 미소는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수십 번은 언급했을 그 이름이 한참이나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초록 창의 도움을 받고서야 ‘맥 라이언’이란 네 글자를 알아냈다. 다들 비슷한 사정인지 또래 지인들과 만날 때면 스피드 퀴즈와 다섯 고개 한판이 벌어진다. 단서를 듣고 기억을 더듬을 때마다 나는 맞추는 쪽이었지만 흐릿해지는 기억과 느려지는 순발력은 문제를 내는 쪽으로 나를 점점 몰아갔다.          


“그때 거기 가서 그거 했어?”      


난 대체 무엇이 궁금했던 걸까. 많은 대명사 중 무엇부터 찾아야 할지, 몇 번의 다섯 고개가 오고 간 뒤에야 비로소 그때와 거기가 명확해진다. 예전엔 어쩌다 일어나는 에피소드였다면 이젠 수없이 끼어드는 일상이 되었다. 3초 안에 어제 먹은 점심 메뉴가 기억나지 않으면 뇌세포가 퇴화 중이라는 연구 결과를 읽었다. 3초라니, 너무 박한 수치 아닌가 싶다가도 10초를 준다한들 떠오를까 의구심이 생긴다. 이쯤 되면 전날 식사 메뉴쯤이야 차라리 잊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그것 말고도 기억해야 할 게 많은 데다 일상적인 대화에서조차 구멍이 뻥뻥 뚫리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하긴 50년을 썼는데 예전처럼 팽팽 돌아가길 바라는 것 자체가 욕심일지 모르겠다. 머릿속을 열어보지 못해서 그렇지 중력에 충실히 반응한 온몸의 변화가 어찌 뇌에만 작용하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그런 상황이 잦아지면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저 자연의 순리로 순순히 받아들이는 게 답인가 싶기도 했다. 단어 하나 금방 떠올리지 못한다고 당장 큰일이 일어나진 않았으니까.           


그보다는 그런 상황이 쌓일수록 모든 것에 자신 없어지는 게 문제였다. 하고 싶은 말을 적당한 속도로 끊김 없이 하는, 그 쉬운 일이 너무 어려워진 것이다. 직업 특성상 다수 앞에서 말할 기회가 많았고 그만큼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읽었던 책 제목이 떠오르지 않거나 다녀왔던 여행지나 작가 이름이 입에서만 맴도는 일이 잦아졌다. 익숙했던 단어들조차 몇 번을 되새겨야 떠오르는 통에 어디에 가든 자꾸 위축됐다. 엄청 어려운 단어라면 입에 붙지 않아서 그렇다고 핑계라도 대련만 식구들에게 가재도구의 위치를 알려줄 때조차 화장대, 싱크대, 냉장고 같은 말이 순식간에 나오지 않았다, 소통이나 해소, 반박처럼 자주 쓰던 단어가 한참을 맴돌다 나올 때 느끼는 무력감(?)은 예상보다 컸다. 특히 은행 업무를 보거나 행정복지센터에서 문의할 때, 가전제품 AS라도 신청해야 하면 어찌나 우물거리는지. 내가 다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런 일이 잦아지자 차라리 키오스크 같은 기계 앞에서 굼뜬 나를 견디는 쪽이 훨씬 수월했다.      

     

뿐만 아니라 책이나 SNS에서 처음 보는 단어들도 자꾸 늘어났다. 예전에도 모든 단어와 어휘를 아는 건 아니라서 어쩌다 모르는 단어를 만나면 앞뒤 문장으로 유추하며 읽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꽤 자주 낯선 단어를 만난다. 알던 것도 잊어버려서 걱정인데 새롭게 알아야 하는 단어는 왜 자꾸 생기고 사람들은 왜 그렇게나 말을 줄여대는지. 올해는 MZ세대가 쓰는 신조어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따라 ‘MZ력’을 측정하는 테스트가 유행하더니 ‘올해의 신조어’를 얼마나 아는지에 따라 옛사람인지, 트렌드에 맞춰 소통하는 인간 트렌더인지 구별하는 과한 친절을 베풀기도 한다.

         

그렇게 새로 알게 된 단어가 생기거나 목구멍에서 깔딱거리던 단어를 꺼내면 그게 달아날까 싶어서 눈에 보이는 아무 종이에 적기 시작했다. 다이어리 구석이나 프린트물 구석에 끄적인 단어가 점점 늘어나면서 산발적으로 퍼진 단어를 하나의 그릇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고 가벼운 수첩을 마련해서 입 속에서 맴돌던 단어나 책 속에서 새로운 단어를 채집할 때마다 적었다. 정확한 뜻이 궁금한 건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그 뜻까지 적어 넣진 않았다. 번거로워지면 모든 시작은 끝을 맞이하기 십상이니까.       

    

한 글자 한 글자 적는 것만으로도 기억의 저장창고가 환기되는 것 같았다. 꽉 닫힌 단어 창고에 문 하나 열어뒀을 뿐인데 그 안으로 새로운 단어가 드나들었다. 구멍 난 뼈 사이로 빠져나가는 칼슘처럼 단어들이 우수수 새기도 했지만 어휘 수첩은 그 틈 사이로 새로운 단어를 실어 날랐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나의 언어 세포가 쪼그라들수록 나의 세계도 좁아질까 두려웠다. 새로운 단어를 알게 될 때 머릿속에 전구가 탕 켜지는 느낌이 간절히 그리웠다. 나의 머릿속 시냅스가 원활하지 않다면 어휘 수첩과 시냅스 사이가 연결되어 내 세계도 한층 넓어지길 바랐다. 그러려면 새로운 언어의 마중물이 필요했다. 책만큼이나 취향을 타는 것도 없어서 의식하지 않는 사이 내 선택이 편협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로 고르던 산문이나 소설과는 다른 언어의 마중물을 부어주기 위해 ‘시 읽기’도 시작했다. 시인의 벼리고 벼린 언어들이 좁아지는 나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굳어가는 뇌세포를 조금은 말랑하게 해 주리라 기대했다.       


구멍 나는 기억력을 채울 좋은 방법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어휘 수첩을 채우고 시를 읽는 사이 초조했던 마음만큼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나름의 방법을 찾아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안이 되었다. 그로 인해 찾아온 안정감 덕분에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덜컥 들어서던 겁을 은근슬쩍 밀어낼 수 있게 됐다. 잊는 만큼 또 채우면 된다는 느긋한 마음도 도움을 주었는지, 최근 일상을 더듬어 보면 단어 때문에 우물거린 일화가 예전만큼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초조함이 가져다준 마음의 위축은 두뇌를 더 굳게 했지만 그 마음을 내려놓자 ‘그깟 거 좀 잊으면 어때? 버벅거리면 뭐 어쩔 건데?’ 같은 패기가 자리 잡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수첩에 적힌 단어를 소리 내어 읽어본다. 입 속에서 굴러가는 소리 하나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이전에 보이지 않던 단어의 맛이 새롭게 다가온다. '무람없다, 도저하다, 경도되다, 나무말미, 빠닥빠닥하다, 아상블라주, 표표하다, 헤살, 이울다, 자별하다...' 관여와 간여를 구별하게 되고 도용과 오용과 남용과 악용 사이의 간격도 무심하게 넘기지 않는다. 잃은 것들에 조금 더 예민해진 덕분에 그냥 지나쳤던 아름다운 단어를 건져냈다. 빠져나간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더 이상 잃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인지도 모르겠다.           


읽고 쓰면서 나의 두뇌를 자꾸 흔들어 깨운다. 이따금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며 잊었던 존재를 눈과 손으로 확인하듯 우리의 두뇌 또한 이따금 뒤집어 봐야 하는 걸까.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자주 쓰는 것은 꺼내 쓰기 편하게 제자리에 놓아두는 것. 기억의 조각을 오래 지니고 싶은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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