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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Oct 29. 2022

FMD

채소의 맛과 공복의 쾌감

         

쌈을 먹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시가 텃밭에 상추며 치커리가 지천에 흐드러졌지만 그걸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쌈을 먹기 시작한 것도 자발적인 시도라기보다 시가에서 공수해온 쌈채소가 물러서 버리는 일을 막아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고깃집에선 오로지 고기에만 전념했다. 그 맛있다는 고깃집 된장찌개도 거들떠보지 않은 채 오직 밥과 고기만 집중 공략하는 밉상을 자처했다. 야들야들한 고기를 뻣뻣한 쌈에 싸 먹는 사람들을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채소 반찬을 잘 챙겨 먹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서 예비 시부모님과의 첫 식사에서 김치를 비롯한 모든 채소를 멀리하는 습관을 들키고 말았다.      


“정희는 채소를 안 좋아하는구나. 통 먹질 않네”     

오랜 시간 내 끼니를 챙겨준 엄마도 어쩌지 못한 식습관인지라 시어머니의 한마디에 멋쩍은 웃음으로 무언의 긍정을 했다. 결혼 후 음식 솜씨가 남다른 시어머니 덕분에 채소 요리를 이것저것 맛보았지만 여전히 김치 없이 먹는 라면이 좋았고 나물이나 쌈은 물론이고 건더기 없이 국물만 홀짝거리는 제로채소인간으로 살았다. 그렇게만 먹어도 건강을 걱정할 일이 없어서 식성을 바꿀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땐 그렇게 먹고 싶은 것만 먹으며 평생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40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그간의 나쁜 식습관의 결과가 슬슬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잇살이라는 군살이 붙어서는 떨어질 생각을 안 하더니 2년마다 나오는 건강 성적표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저혈압을 걱정하던 내가 정상 혈압을 거쳐 고혈압으로 가는 위험 구간에 들어섰고 공복혈당도 당뇨병 전 단계 수치에 턱걸이하듯 걸렸다. 게다가 콜레스테롤 수치가 눈에 띄게 늘어나 고지혈증을 의심해볼 만한 단계에 이르렀다.

          

갑자기 모든 수치가 경계 수준에 들어서자 근거 있는 염려가 시작됐다. 2년 사이에 이렇게 나빠질 수 있는 건가 싶어서 지난 검사 결과지를 찾아내 그간의 수치를 점검해봤다. 역시나 조금씩, 정말 아주 조금씩, 시나브로 늘어나고 있었다. 살이 좀 붙었지만 체중은 여전히 적정 구간이었다. 그래서 올라가는 각종 수치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이미 5-6년 전부터 수치는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언제까지나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는 없었다. 피 속 사정은 금방 확인할 수 없으니 언제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체중부터 줄여보자 마음먹었다. 교통사고와 낙상사고로 1년 이상 멈춰버린 걷기를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오래 누워 지낸 몸뚱이는 그사이 많이 달라져있었다. 골절 부위는 조금만 움직여도 뻐근했고 온몸의 근육은 온데간데 없어진 데다 하도 오랜만에 걸어서 그런지 주변 풍경이 잔뜩 흔들렸다. 뱃사람이 느낀다는 육지 멀미가 이런 걸까 싶게 사방이 어지러웠다. 그걸 참으며 간신히 걸었고 매일 조금씩 속도를 높이면서 거리를 늘려갔다. 하지만 그 정도 걷기로는 운동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고 당연히 손톱만큼의 체중도 줄지 않았다.     

     

많이 먹지는 않지만(그렇다 치고) 음식에 대한 호불호가 확실해서 식습관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뭐부터 개선해야 할지 잘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검색만 하면 각종 체중감량 방법이 주르륵 나왔지만 효과가 확실하다는 방법은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도가 무시무시했고 과연 건강에 도움이 될지도 의심스러웠다. 당류 제한 식단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알아봤지만 탄수화물 의존이 심한 내가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아예 시도하지 않았다. 무얼 해야 좋을지 모르겠을 땐 목표부터 제대로 잡는 것이 중요했다. 내 건강을 위한 첫 번째 목표는 체중 감량이 아닌 혈당과 콜레스테롤 관리라는 걸 다시 상기했다.     


그러자 문득 지인이 얘기했던 식단이 떠올랐다. 그땐 내 상태가 이 정도인 줄 모르고 흘려들었던 터라 기억이 흐릿했지만 그 식단을 적극 추천하던 지인의 생기만큼은 또렷하게 떠올랐다. 때마침 만날 일이 있어서 그 식단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미국의 장수학 연구소 소장인 발터 롱고 박사가 25년간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제시한 식이요법이라는 점에서 우선 신뢰가 갔다. 정확한 명칭은 FMD(Fasting Mimicking Diet)로 5일 동안 육류와 열량을 제한한 단식 모방 식단을 의미한다. 물과 소금만 먹는 단식을 연상했지만 이 식단은 하루에 먹는 섭취량이 적지 않았다. 배고픔 없이 진행할 수 있다는 점과 몸이 부쩍 가벼워졌다는 지인의 후기가 마음에 들었다. 백문이 불여일행(百聞不如一行). 일단 시작해보기로 했다.       

   

정확한 계량을 위해 주방 저울을 준비하고 질 좋은 올리브 오일과 발사믹 식초도 구입했다. 5일 동안 먹을 견과류와 각종 채소까지 준비를 끝낸 뒤 첫날은 찐 고구마와 샐러드, 아몬드와 호두로 시작했다. 정해진 양을 하루 동안 나눠먹는 방식이라 헛헛할 땐 견과류를 오독오독 씹으며 배고픔을 달랬다. 허기에 시달릴까 걱정했지만 그보다는 난데없이 두통이 먼저 몰려왔다. 시작한 지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낯선 증상이 나타나자 슬쩍 겁이 났다. 5일 동안 내내 이러면 어쩌지 싶어서 이 식단과 관련된 증상을 찾아보니 두통을 호소한 후기가 꽤 많았다. 평소 탄수화물 섭취가 많았던 사람들에게 주로 나타난다고 했다. 밥, 빵, 면으로 가득 채워진 식사 습관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첫날 깨질 것 같던 두통은 다음날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싹 사라졌다. 아침마다 딴 사람으로 만들던 붓기도 사라져서 가볍게 눈뜬 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게다가 둘째 날부터 이어진 본격적인 식단은 재료 본연의 맛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 주었다. 파프리카의 단맛과 당근의 고소함이 새로웠다. 양상추의 아삭한 식감과 즙은 풍부하고 싱그러웠다. 몇 번 씹지 않고 대충 삼키던 식습관도 각종 생채소를 꼭꼭 씹다 보니 저절로 고쳐졌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채소를 먹어본 적이 있었나 싶은 5일을 보내고 나자 몸이 가벼워진다는 지인의 말을 알 것 같았다. 체중의 변화가 아니라 몸의 붓기가 사라진 느낌이 좋았다. 매일 다른 식단을 준비하느라 좀 번거로웠지만 아침마다 그날 먹을 음식을 계량하고 씻고 자르면서 내 몸에 들어가는 음식에 온전히 집중한 경험도 꽤 좋았다. 그렇게 5일을 무사히 마친 뒤 체중계 위에 올라섰더니 1.5kg이 줄어있었다. 기대만큼 드라마틱한 체중 변화는 아니었지만 체감상으론 그 이상을 덜어낸 가뿐한 느낌이라 만족스러웠다. 식단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의 식습관으로 돌아갔지만 과하게 부풀어있던 위가 5일 동안 원래 크기로 돌아갔는지 조금만 먹어도 금세 배부름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 생전 처음으로 채소에 대한 식욕을 느끼게 됐다.     

       

이후 이 식단을 경험한 분들의 후기를 관심 있게 보면서 사람의 몸이란 얼마나 천차만별인지 다시 알게 됐다. 나타나는 증상과 목표에 대한 결과, 체감하는 장점과 단점이 저마다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니 일단은 경험해볼 수밖에. 그래야 뭐든 알게 된다. 두 번의 체험 후에 내가 찾은 제일 큰 장점은 체중감량이나 빠져나갔는지 알 수 없는 독소 배출 같은 것이 아니라 채소 고유의 맛을 알게 된 점이다. 뻣뻣한 식감과 풀 비린내만 연상했던 나에게 자연의 색과 맛이 품은 싱그러움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 맛을 알게 되자 라면이 얼마나 짠맛 덩어리인지 튀김 안에 축축한 기름이 얼마나 많이 스며들어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이후 정기검진을 통해 혈압과 혈당이 다시 정상 수준을 회복한 걸 확인했다. 이 식단 덕분이라고 하긴 조심스럽지만 식습관 전반에 걸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친 것은 확실했다.           


과일과 채소 섭취를 늘리는 것은 건강 수치의 변화만이 아니라 영양소의 균형면에서도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심지어 행복감과도 관련 있다는 연구결과까지 나왔는데 과일과 채소 섭취를 하루 여덟  정도 높이면 실업자가 취업했을 때만큼이나 행복감과 삶의 만족도가 상승한다고 하니 채소 섭취는 여러모로 무해다익(無害多益)이라   있다. FMD식단을 경험한   역시 주변 사람들에게 조심스레 추천해보지만  식단을 처음 들었을 때의 나처럼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아직 다들 건강하구나. 다행스럽다. 하지만 식습관의 변화가 필요하거나 건강의 적신호를 받아 드는 날엔  식단이 떠올랐으면 좋겠다. 밑져야 본전의 마인드로 식사 준비의 번거로움을 즐기며 5일의 건강 식단을 경험해봐도 좋겠다. 나이 오십에서야 알게  채소의 맛은 얼마나 다채로운지.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혼자만 알긴 너무 아까우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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