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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Oct 29. 2022

사랑보다 연민

기꺼이 그의 신발을 신어보는 마음

      

첫 책을 내고 남편에 대한 공감 어린 후기를 많이 접했다. 한 독자는 우리 신랑 잡으러 집에 찾아갈뻔했다는 농담을 남기기도 했지만 ‘우리 집에도 그런 사람 있어요’라는 고백으로 이어지는 후기가 대부분이었다. 역시나 모든 부부 사이엔 쌓인 시간만큼의 서운함이 어쩔 수 없이 깔리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기는 불협화음은 부부생활의 기본값일 수밖에 없는 걸까? 다르니까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니 또 다르게 보이는 쳇바퀴는 빠져나올 틈 없이 돌고 돈다. 우리 부부 사정만 보아도 나와 남편이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알아차리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남편은 어느 자리에서건 말의 주도권을 놓지 않고 감정을 발산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안으로 숨어들 때 편안함을 느끼고 시끄러운 남편의 에너지가 버거워 그를 조용히 시키느라 바쁘다. 화가 나면 100도로 금세 우르르 끓어 넘치는 능력의 소유자가 남편이라면 나는 그 열기에 델까 봐 입을 꾹 닫아버리고 마는 그런 사람이다. 며칠 전엔 남편이 ‘내가 삶은 계란 껍데기는 안 까지는데 네가 삶으면 잘 까져’ 라며 나에게 계란 삶는 노하우를 물어보았다. 이런 칭찬을 들을 때 역시 남편과 나의 반응은 확실하게 나뉜다. 나는 ‘그때 어떻게 했었지? 뭐 특별한 거 없었는데 이번에 안 되면 어쩌지?’ 하며 노심초사한다면 남편은 그 칭찬에 한껏 신이 나서 ‘그래? 그럼 내가 다 해 줄게. 말만 해.’ 하는 그런 사람이다.          


언뜻 순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한없이 예민한 ‘나’

언뜻 괴팍해 보이지만 조금 지내보면 착한 마음밭이 느껴지는, 단순한 ‘남편’    

       

이렇게나 다른 남편과 살면서 나름 남편을 연구하고 그에 맞게 대처하느라 애써보지만 그게 쉽지 않다. 자주 부딪치고 마음에 생긴 실금은 오래 나를 괴롭힌다. 그럴 때마다 나의 연구대상에 대해 나만큼이나 오래 보아온 딸과 이야기 나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투로 대화가 오가는지 부연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데다 미묘한 느낌과 어조를 알기 때문에 누구보다 이야기가  통한다. 언젠가 ‘자녀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만들지 말라 글을 읽고 깊이 반성한 뒤로는 남편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털어놓는  가능한 줄이고 있지만 딸만큼 마음 놓고 얘기를  사람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오랜 훈련(?) 기간에 적응한 탓인지, 워낙 이야기를  들어주는 성향을 타고나서 그런지 딸만큼  속사정을 이해해주는 이는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같다.           


허나 내가 간과한 게 있으니 딸은 아빠 못지않게 엄마도 오래 관찰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일방적인 관계가 어디 있겠는가. 내가 남편에게 불만이 있으면 남편 역시 그만큼의 불만을 내게 갖고 있다. 그런데도 딸은 무조건 엄마 편이라고 믿으며 112 신고하듯 각종 불평불만을 딸에게 늘어놨다. 그날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며 푸파 푸파 흉을 늘어놓는데 잠잠히 듣던 딸이 말했다.     


“엄마는 아직도 아빠를 참 사랑하나 봐.”

     

아니 이게 웬 말인가. 사아라앙? 사랑이라니, 언제 사라졌는지 알 수도 없는 그걸 내가 한다고?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무 대답 못하는 내게 딸이 이어서 말했다.     

“좋아하니까 기대하게 되고 기대가 있으니까 아빠의 대화법이나 가치관에 실망하는 거 아닐까? 여태 그렇게 반복했으면서 엄마는 왜 아직 아빠를 내려놓지 못해?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될 텐데.”     

엥? 그러게. 나 왜 못 그랬지? 남들한테는 물 흐르듯 흘리라는 말을 조언이랍시고 작작 했으면서 정작 나는 남편에게 한순간도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면 정말 사랑인 거야? 나 너 사랑하냐?          


그랬다. 나는 아직도 남편에게 기대라는 걸 했다. 그것이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하면서도 남편을 바꿔보려고, 내 생각대로 이끌어보려고 무던히 애썼다. 포기할 시점이 지났는데도 아직 희망을 쥐고 있었다. 사랑이란 감정의 기한은 지난 지 오래됐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이라도 원만한 합의(?)에 이르려면 서로를 견딜 무언가가 필요했다. 사랑에 담긴 수많은 감정 중 무엇을 끌어올려 빈자리를 채워야 할까? 공감, 애틋함, 허용, 이해, 배려... 어떤 관계에서든 ‘귀여움’은 만능 콩깍지라던데 일단 귀여워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이 사람, 귀여워하는 건 너무나 무리 아닌가. 그 생각의 끝에 한 단어가 둥실 떠올랐다. ‘연민’이었다.        

   

김훈 작가는 <연필로 쓰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빚쟁이처럼 사랑을 내놓으라고 닦달하지 말고 서로를 가엾이 여기면서 살아라”.   

   

가엾게 여기기.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을 시작하자 남편을 향한 시선이 아주 조금은 달라졌다. 어김없이 자주 속상하고 정말 왜 저럴까 싶지만 그렇게 화가 났다가도 제풀에 쓱 누그러졌다. 세상의 가치관은 팽팽 소리 나게 바뀌는데 거기에 발맞추지 못하는 본인은 얼마나 답답할까. ‘으이구, 못났다, 못났어’ 하다가도 가여운 마음이 올라왔다. 세상에 부대끼면서도 꿋꿋하게 가족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다하니 얼마나 대견한가에까지 생각이 이르면 별안간 속이 편안해졌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며 포기하려 애쓸 때는 그렇게나 못 견디겠더니 날씨처럼 그냥 받아들이니까 할 만했다. 비올 땐 우산 쓰고 바람 불 땐 옷을 여미면 그만이었다.    

      

한때 자존감의 정도를 알 수 있는 질문이라며 인터넷에 떠돌던 문장이 있다.

“모든 면에서 당신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과 연애하거나 결혼하고 싶은가요? 그러니까, 당신은 평생 당신 같은 사람과 즐거이 지낼 수 있나요?”

예전의 나는 이 질문에 잠시도 뜸 들이지 않고 ‘암요!’라고 대답했을 거다. 그런데 보는 시선 하나 바꿨을 뿐인데 선 자리가 달라졌다. 슬그머니 그의 자리로 옮겨진 뒤에 바라본 나는 그리 즐거이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편을 연민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자 더 이상 긍정의 답이 안 나왔다. 나의 까탈스러움, 두려움에서 비롯된 나의 예민함을 견뎌내고 있는 남편이 보였던 것이다. 나만 견딘 게 아니었다.       

    

인디언 속담 중에 ‘ 사람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기 전에는 함부로  사람을 비난하거나 흉보지 말라 말이 있다. 연민은 기꺼이  신발을 신어보는 마음이다.  신을 신고 상대의 하루를 밟아보는 일이며 상대의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노력이다. 그러다 보면 어쩔  없는 포기와 단념의 마음을 뛰어넘어 상대를 향했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온다. 상대의 눈으로 보는 나의 모습이 드러난다. 나도  괜찮은 인간은 아니라는 각성이 몰려온다. 나만 아는 나의 민낯이 몹시 부끄러워질 때면  모습 또한 얼른 연민으로 품어본다.           


서로를 가엾게 여긴다고 해서 만병통치약처럼 모든 일이 해결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의 마음속에 새겨진 깊은 골만큼은 아주 조금씩 메워질 거라 믿어본다. 나는 이제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 허나 그보다 더 넓은 지경에서 그를 만난다. 은근하고 뭉근한 열기로 그를 품는다. 연민의 안경을 끼면 눈비에 불평하지 않고 쾌청한 온도와 바람엔 감사할 수 있게 된다. 딸이 선물한 크고 넓은 통찰의 힘을 발휘해 안간힘을 쓰다 보면 남은 인생도 나란히 완주할 거라 기대해본다. 뭐 어떻게든 완주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를 위해서가 아닌 너와 나의 가여운 인생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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