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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Dec 01. 2022

기억 의심하기

기억의 거리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엄마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사랑하는 딸. 엄마. 여행갖다. 올게. 다낭 오늘출발해서11일에도착한다. 너가 전화해서. 안 받으면. 걱정할까봐 문자보낸다. 지금공항이니까. 전화하지말아. 잘다녀올게. 사랑한다.”     


6년 전 남편을 여의고 혼자된 엄마가 문자 하나 달랑 남기고 여행을 떠났다. 누구와 가는지, 그것도 해외씩이나 다녀오게 됐는지 궁금했지만 좋게 말하면 깔끔하고 엄밀히 말하면 정 없는 엄마의 성미답게 걱정도 연락도 말라는 말만 남긴 채 출발했다. 그제야 며칠 전 엄마가 보낸 뜬금없는 사진 한 장의 비밀이 풀렸다. 일본 돈 만 엔과 10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이 담긴 사진을 보내며 돈의 국적을 물었던 것이다. 출처를 알려주기 위해 짧게 통화했지만 갑자기 그걸 왜 묻느냐는 내 질문에 엄마는 정리하다가 발견했다고만 답했었다.      


미리 알았다면 용돈을 챙겨드렸을 텐데 엄마는 그것마저 부담이 되었을까? 홀로 조용히 여행을 준비하곤 이때다! 하며 비행기에 오르는 엄마가 보이는 듯했다. 맞춤법은 잔뜩 틀리고 띄어쓰기 대신 온점으로 범벅이 된 문자를 보고 있자니 칠십을 훌쩍 넘은 엄마가 돋보기 너머를 살피며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쓰는 모습도 눈에 선했다. 엄마가 다낭의 어느 거리를 걷는 동안 나는 엄마가 남긴 문자를 읽고 또 읽었다. 그때마다 한 문장 앞에서 자꾸만 마음이 시렸다.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땐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그 말을 엄마는 늘상 해왔다는 듯 능숙하게 남겼다.      


네 글자에 담긴 엄마의 마음을 얼마나 의심했는지 모른다. 사랑받지 못하는 딸이라 여기게 된 수많은 기억이 나를 오래 괴롭혀왔기 때문이다. 엄마가 친히 보여준 많은 증거를 세월 속에 흘려보내려 애쓸수록 의심하는 마음은 단단해지기만 했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문장 하나는 그 마음에 처음으로 균열을 만들었다. 그리곤 기다렸다는 듯 그 틈으로 생각 하나가 스며들었다. ‘어쩌면 나를 진짜 사랑했는지도 몰라.’     


아주 어릴 때부터 오십을 넘긴 지금까지도 엄마의 사랑을 믿지 못했다. 태어나면 자동으로 주어지는 줄 알았던 무조건적인 부모의 사랑에 나는 늘 목말랐다. 3살 터울 오빠에게 빼앗긴 사랑과 관심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나는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 늘 애써야 했다. 누구도 챙겨주지 않으니 내 일은 스스로 알아서 챙겨야 했다. 저절로 받을 수 없는 사랑이라면 잘 해내서 인정이라도 받아야 했다. “너희 엄마는 한 번도 잔소리하지 않으며 키웠어. 뭐든 알아서 잘 챙기고 자기 관리가 확실했어.”라며 엄마가 내 아이들에게 자랑 섞인 칭찬을 할 때마다 전혀 반갑지 않았다. 어떻게든 스스로를 챙겨야 했던 어린 나의 다급한 모습이 떠올라 나만 아는 씁쓸한 미소로 순간을 무마했다.     


의심의 시작은 자라면서 들어온 어떤 이야기들이었다. 농담처럼, 우스운 이야기처럼 내 앞을 흐르던 그 말들은 뾰족한 가시처럼 머릿속에 박혀서 좀처럼 뽑혀 나가지 않았다. 첫 번째 가시는 아이가 바뀌었다는 친할머니의 억지였다. 조산원에서 태어난 오빠와 달리 나는 병원에서 낳았는데 친할머니이자 엄마의 시어머니는 아들이 분명했는데 왜 딸이냐며 병원에서 아이가 바뀌었다고 내내 억지를 부리셨다는 거다. 할머니는 영락없는 옛날 분이니까, 아들이 귀한 집이니 하나보단 둘이 좋다고 생각했을 테니 얼마간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 이어진 엄마의 말은 나를 자꾸만 긁었다. 나를 낳은 뒤 산후조리할 때 나를 눕힌 쪽으로 돌려 눕지 않았다든지, 품에 안고 젖을 물린 적이 없다는 말들이 그랬다.      


엄마가 어떤 의도로 그랬는지, 만약 그랬다 해도 왜 나에게 그런 얘기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할머니에 대한 원망을 가벼운 농담처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땐 드러내 놓고 그 상황을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을 만큼 어렸고 다 큰 뒤엔 엄마가 받을 상처가 염려될 만큼 철이 들었다. 그래서 그 얘기가 전한 충격인지 뭔지 모를 상처가 나를 할퀴고 지나가게 내버려 두었고 이후엔 아물지도 못한 상처를 거즈로 덮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엄마에게서 뿜어져 나온 차가운 기운 탓인지 나는 돌이 되기 전에 백일해에 걸려 생사를 염려할 정도로 오래 아팠다고 한다. 그래서 돌사진도 없는 어린이가 되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단 농담에 자주 움찔거렸다. 갓난쟁이에게 온 우주였던 엄마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기억은 이후의 경험을 더욱 증폭된 아픔으로 남겼다. 바로 아들에게만 흐른 내리사랑이었다.      


어릴 땐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도 오빠는 늘 뭔가 흘리고 다니는 칠칠치 못한 아들이었다. 부모가 보기에도 믿음직스럽지 못한 아픈 손가락이니까 부모가 더 챙기고 마음 쓰는 건 당연하다고 이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동생을 때리는 아들을 호되게 가르치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건 아니다. 부모님이 장사하시는 동안 집을 비우면 나는 갖가지 심부름에 시달리고 오빠 친구들이 오면 밥상을 차려야 했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오빠에게 자주 맞았다. 고작 초등학교 4-5학년이었으니 내가 믿을 구석은 부모뿐. 소심한 복수랍시고 번번이 일렀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시시한 대답만 돌아왔고 오빠는 달라지지 않았다, 내 성에 차는 꾸중이나 벌 대신 오빠의 짓궂은 보복이 돌아오자 제풀에 지친 나는 고자질을 멈췄다.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는 아빠의 농담은 어쩌면 농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의 치기 어린 의심 따위라면 차라리 나았을까? 차곡차곡 쌓인 억울한 기억과 오빠를 향한 부모님의 외사랑,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갈구, 나를 괴롭힌 오빠에 대한 분노는 몽땅 부모님에게, 정확히 말하면 엄마에게 분노의 화살이 되어 날아갔다. 차가운 엄마와 달리 아빠는 다정한 추억을 수없이 만들어주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지지의 대상이 되어주었으며 돌아가신 뒤에 남은 끝없는 그리움은 아빠를 향한 서운함을 몰아낸 까닭이었다.     


그래서, 그러므로, 나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다. (‘않는다’ 가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받은 사랑이 턱없이 부족해서 나눠줄 사랑이 없다. 안타깝게도 나는 엄마의 차가운 성격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고 그것은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기보단 당시 엄마에게 내 존재가 어땠을지 실감하게 만드는 증거만 됐다.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심으로 늘 흔들렸지만 무사히(?) 학창 시절을 마친 나는 그 결핍을 다른 사랑으로 채워야 했다. 한 번도 누군가에게 첫 번째가 되지 못했으니 나를 첫 번째로 사랑해줄 누군가를 찾아 헤맸다.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나를 받아줄, 받아줄 수밖에 없는 상대를 찾았고 그런 미성숙한 연애는 당연히 크고 작은 상처를 남겼다. 어디에도 없고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부모 사랑의 빈 구멍을 느낄 때마다 그것을 주지 않은 엄마에게 죄를 묻고 싶었다.      


이렇게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던 딸들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면 자신의 엄마를 이해하고 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판타지 같은 이야기는 나에게 통하지 않았다. 결혼 후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나는 엄마를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귀하고 이렇게 예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데 엄마는 어떻게 나를 눕혀놓고 뒤돌아버렸을까? 안아주지도 않고 멀찌감치서 분유병만 물렸을까? 내 아이를 품에 안고 눈을 맞추며 젖을 물릴 때면 때때로 사무치게 외로웠다. 분노와 도움을 호소하던 딸의 두려움을 한없이 가볍게 여긴 엄마의 마음은 무엇이었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분풀이하듯 꺼내기엔 엄마와의 유대감이 형편없었다. 수면 위로 끌어올려봤다가는 와장창 하고 깨질 것만 같아서 거즈 아래 감춰둔 상처를 나 스스로 보듬으려 몸부림쳤다. 자연스레 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조금씩 공부를 이어가면서 유아기 애착 관계에 몰두했다. 보드라운 털을 찾아가는 ‘볼비’의 실험 속 아기 원숭이가 나 같아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나치게 예민하고 자주 불안해하는 나에게 완벽한 안심은 절대 주어지지 않을 무지개 같았다. 무조건적인 엄마의 사랑도 받지 못한 탓에 타인의 사랑은 더 자주 의심하게 됐고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테니 나라도 나를 더 사랑해야 했다. 그럴수록 나는, 나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갔고 마음은 점점 더 인색해졌다. 그렇게 딱딱해지는 나를 볼 때마다, 그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모든 것이 다 엄마 탓 같았다.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손을 꼭 잡거나 팔짱을 끼고 걷는 모녀를 보면 부럽다가도 엄마와 나의 모습을 상상하면 바로 어색해지곤 했다. 부모에게서 배우지 못한 친밀한 관계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보이지 않는 ‘선’을 만들었다. 누구든, 언제든 그 선을 넘으려는 낌새를 보이면 나도 모르게 거리를 두었다. 충분히 사랑받았다는 안도감 위에서 스스로를 자연스레 느끼고 타인과 부담 없이 가까워지는 경험의 부재는 생각보다 큰 결핍의 결과로 남았다.     


얼마 전 김소연 시인의 산문 ‘어금니 깨물기’를 읽었다. 김소연 시인의 아름다운 문장에 이끌리듯 집어 든 책에는 엄마와 딸의 사이의 모순된 감정에 얽힌 이야기가 가득했다. 표지에는 작가와 작가의 어머니가 함께 찍은 어린 시절의 사진이 실려있었다. 작가의 어머니가 어린 김소연 시인을 한 옆에 포옥 안고 나란히 앉은 모습이었다. 그 사진을 보자 엄마와 단둘이 찍은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3살쯤이었을까? 잔디밭 위에 앉은 엄마와 내 사진이었다. 내 기억에 그 사진 속 엄마와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고 나는 작은 단풍잎 같은 손으로 들풀 하나를 잡은 채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엄마의 모습은 젊고 풍성했던 것 같다. 역시 우리는 그때도 그렇게 멀었구나 싶어서 다정한 김소연 시인 모녀 사진에 또 한 번 마음이 시큰거렸다. 그러다 문득 그 거리가 정말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기억이란 의도치 않게 왜곡되거나 편집되기도 한다는데 나 역시 그렇게 믿어버린 건 아닌지 궁금했다. 사진첩을 들추고 사진을 모아둔 함을 찾아봤지만 내가 찾는 그 사진은 없었다. 흔치 않은 우리 모녀의 투샷이라 어딘가에 잘 모셔둔 모양인데 그럴수록 더 꽁꽁 숨어버리기도 한다. 한참을 찾다가 이제 와서 확인한들 무엇이 달라지나 싶어서 그만두었다. 그리곤 잊었다.     


엊그제 아빠의 기일을 맞아 아빠에게 받은 편지함을 열어보게 됐다. 아빠는 여행을 가면 나에게 엽서를 보내곤 했다. 그 덕분에 여행지의 풍경과 아빠의 손글씨는 다정한 유산처럼 남았다. 아빠가 찾아 건네준 네잎클로버도 코팅지에 싸여 여전히 반짝거렸다. 그리고 그곳에 그렇게나 찾던 엄마와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걸 보고 이내 놀랐다. 엄마와 나는 멀찍이 떨어져 앉기는커녕 빈틈없이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내가 기억한 우리 사이의 거리는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었을까? 부모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부모는 짐작할 수 없는 이유로, 자녀는 부모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 역시 그랬던 걸까? 어쩌면 엄마의 문자처럼, 엄마는 나를 정말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정작 엄마를 사랑하지 못한 건 나였는지도.      


때때로 내 기억을 의심해본다. 그리고 지금 눈에 보이는 것 그대로를 믿어본다. 기억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어떤 기억을 품고 살지 결정하는 것은 사랑의 퍼즐을 제대로 맞추는 첫걸음 인지도 모르겠다. 엄마와 나 사이의 밀착을 확인한 그날, 비로소 그 한 걸음을 떼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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