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희 Dec 20. 2022

시작 수집

시작이 취미입니다

   



50대에 들어서자 마음가짐이 확 달라졌다. 그간은 젊다고 빡빡 우기면 어느 정도 속아줄 수 있는 나이였다면 이제는 더 이상, 아무리 용을 써도 더 이상 젊지 않다는 나이의 압박이 느껴졌다. 그것은 혼자만의 자격지심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차라리 좋았겠지만 몸 여기저기서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와 이전엔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이들의 냉소와 푸대접은 변화를 단단히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외부와 내부에서 나이 듦에 대해 한 목소리로 떠드는 통에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없었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말을 꺼낼 때마다 어쩐지 자꾸 초라해졌다. 나이 같은 건 나와 상관없다며 쿨하게 외면하고도 싶지만 그건 부정의 또 다른 모습이었음을모르지 않았다.      


젊은 시절의 나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몸과 기운의 시듦을 뜻하는 정도로만 짐작했다. 하지만 그 시점에 도착하고 보니 그 예측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알게 됐다. 나이는 갖고 싶지 않은 것을 무수히 주고 잃고 싶지 않은 것을 참 많이도 가져갔다. 반갑지 않은 주름과 기미를 갖다주고 소중한 시력과 머리카락을 가져갔으며 의식하지 못했던 관절의 위치를 고통과 함께 인식하게 했고 사회가 내민 기회의 손을 자연스레 거두어갔다. 그뿐인가. 무엇이든 꿈꿀 수 있다는 가능성과 긍정 대신 ‘이 나이에?’라는 위축된 마음만 남겼다. 응원받던 자리에서 시작을 엄두 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자리로 옮겨가자 더 이상 ‘미래’의 내가 궁금하지 않았다. 기회와 시도가 제거된 나의 일상은 이제 시들 일만 남은 채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낄 기회조차 허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무언가 노선을 정해야 했다. 이대로 나이에 순응하며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지, 지금의 건강과 여유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쓸지. 내 앞에 남은 인생의 길이를 알 수 있다면 어떤 다짐이든 좀 더 수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때론 세상과 이별할 날을 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누군가에게 그 생각을 전하자 그렇게 되면 남은 하루하루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괴로울 거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미래를 모를 때 오히려 현재의 무언가를 견딜 수도 버틸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겐 ‘희망’이란 지푸라기가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축복일지 모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 무엇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내일이니  우리는 그저 오늘 할 수 있는 뭔가를 할 뿐이다. 그것이 모여 나의 미래가 되고 때론 내가 원했던 모습에 한발 다가가는 징검다리가 되어준다. 생각이 거기에 닿자 멀리 도망가던 ‘시작‘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아직은 내 옆에 있겠다며 나에게 다가왔다. 내일에 대한 희미한 기대와 함께 시작 수집은 그렇게 시작됐다.     

 

경제학자 오마에 겐이치는 “인간을 바꾸는 방법은 3가지뿐이다. 시간을 달리 쓰는 것, 사는 곳을 바꾸는 것,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 이 3가지 방법이 아니면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은 가장 무의미한 행위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결심의 나약함을 꼬집는 말이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그런 사소한 결심조차 언제 해봤나 싶게 나는 매일 살던 대로 살아가는 중이었다. 나이 먹는 게 싫다면서 습관처럼 나이 핑계를 대며 게으름 뒤에 숨었고 더 잘 살아보려는 안간힘은 나 몰라라 했으니 말이다. 시작이 습관이 되는 것은 산뜻한 일이라고 말은 쉽게 했으면서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 공들이고 애쓰는 건 몹시 귀찮아했다. 이런 나라서 매 순간이 처음인 듯 천연덕스럽게 시작을 반복한다. 작심삼일도 필요 없다. 작심일일이면 어떤가. 생각이 끼어들 틈을 주지 말고 그냥 지금 하면 되는것이다. 처음의 설렘을 자주 누리는 건 꽤나 큰 활력이 된다.     

  

시작과 함께 끝을 상상하면 모든 것은 더 또렷해진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인생의 끝에 다가갈수록 무엇을 시작할지 더 선명해지는지 모른다. 마지막을 떠올리면 이런 나로 죽을 수 없다는 아찔함이 몰려와 나를 달라지게 만든다. 이런 모습으로 삶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은 지금에 좀 더 집중하게 만든다. 방송인 홍진경 씨는 행복이란 잠자리에 누웠을 때 아무 걱정이 없는 상태라고 했다. 그렇게 깨끗한 안심과 자신에 대한 만족감으로 생의 마지막 잠을 맞이하고 싶다. 부족함 투성이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인간이었다는, 적어도 그렇게 살기 위해 애쓴 나를 다독이며 그 순간을 맞이하고 싶다.      


나는 이제 가정 내에서 맡은 역할과 의무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렀다. 곧 나 홀로 서야 하는 때가 올 거라 생각하면 이 나이가 돌연 반가워진다. 어떤 모습으로 독립을 이루고 맞을 것인가. 그 생각만으로도 일상이 달리 보인다. 비효율적이라며 미뤘던 것을 하나하나 시작해도 될 때가 온 것이다. 천덕꾸러기 같은 시작이 끼어들수록 내 삶은 더 풍요롭고 재미있어질 것이다.     

 

20년의 유배형이 지나고 젊음과 명예 모든 것을 잃은 다산 정약용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매일 다시 태어나리라.”

이렇게 거창한 다짐이 아니어도 매일 시작하는 마음은 정체된 삶에 활력이 되고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 잡는 중심추가 될 수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처럼 비장한 각오가 아니어도 괜찮다. 어쩌면 가벼운 시작일수록 좋다. 작은 시작이 꾸준함을 입었을 때 얼마나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지 보여주는 본보기가 여기 있다. 2022년 ‘교보 손글씨 대회’에서 으뜸상을 수상한 김혜남 선생의 시작이 그러하다. 올해 82세, 역대 최고령 수상자인 할머니의 손글씨는 20년 전 맞이한 퇴직과 함께 시작됐다. 성경 한 줄에서 시작된 필사는 한 권을 통째로 필사하는 것으로 이어져 퇴직 후 20년 동안 열네 번을 반복하기에 이른다.     


사소한 시작이 이렇게 영광스러운 결과물까지 만들어내는 것에 심취할 필요는 없다. 꼭 무엇이 되지 않아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결과라 해도 시작하고 이어가는 과정 속에서 우린 이미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과 삶을 원하는 대로 꾸려간다는 자긍심은 또 다른 시작을 불러온다.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안 해도 그만이다. 하지만 시작의 흥분과 설렘까지 포기하는 것임은 잊지 말아야 한다. 실패를 통한 성장과 같은 뜬구름은 벗어던지자. 오로지 스스로와 좀 더 친해지고 나는 왜 여기서 이런 모양으로 살아가는지 탐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시작이 있는 한 새로운 삶은 계속될 테니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일의 정의 다시 세우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