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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지 앞에서의 일기.


재를 머금은 구름

호그와트 정류장에 발걸음을 멈춘 셜록


런던아이가 나를 바라봐

빅벤의 시계는 보이지 않아


해가 지면 길을 여는 다리

귀를 스쳐 지나가는 팅커벨


레이챌 맥아담스를 찾아 방황하는 자

눈을 굳게 감아도 돌아가지 않는 시간


셰익스피어에게는

비극일까 희극일까




우중충한 날씨와 대비되는 깔끔한 거리. 영화에서 보다 보니 집 앞처럼 익숙한 도시 풍경. 일찍 퇴근하여 스탠딩 바에서 맥주를 즐기는 정장 차림의 모델 같은 회사원들. 런던도 사람 사는 곳이라 슬픔과 괴로움이 없겠건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은 완벽하다. 어찌나 다들 멋진지.


그들의 일상생활을 탐하며 베이커 스트리트로 향한다. 셜록 홈스의 집이 있는 거리이다. 납치를 당해도 셜록이 다 찾아줄 것이므로 걱정이 없다. 괜히 지나가는 사람의 옷과 피부를 훔쳐본다. ‘음, 저 학생은 외투에 억센 털이 있는 것을 보니 집에 고양이를 키우고 있군’. ‘저 남자는 걸음걸이가 곧고 눈빛에 자신감을 넘치는 것을 보니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겠어.’ 정답 없는 탐정놀이에 잠시 빠진다.


벤스 쿠키에서 초코맛 쿠키를 하나 사 들고 킹스크로스 역으로 이동하였다. 호그와트로 가는 정류장이 역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정류장에 도착하니 이미 다른 머글들이 길게 줄을 서있다. 30여분을 기다려 차례가 왔고 카트를 힘껏 밀었다. 마법세계로 들어갈 수 없었다. 속상하다. 나도 머글이었던 것이다. 기념품 점에서 지팡이를 하나 구매하고 외쳐보았다. “스투페파이!’.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마법사였다면 누군가는 기절했을 것이다.


빅벤이 보인다. 이름을 모르는 클래식 음악이 마음속에서 장엄하게 울린다. 빅벤을 지나치고 한참이 지나 어느 다리를 지나는데 강 건너편 다리가 개방된다. ‘저곳이 타워브리지구나’. 다리가 열리는 알맞은 타이밍에 맞춰 온 것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날벌레인지 파리인지 모를 벌레가 귀를 스쳐 지나간다. 다시 생각해 보니 팅커벨이었던 것 같다. 다리 위에 바람이 상당히 많이 불었기 때문에 벌레는 날 수 없는 환경이었다. 팅커벨이 확실하다.


해가 지고 야경이 펼쳐졌다. 이프온리의 남주인공이 되어 런던아이를 지난다. 물론 제니퍼 러브휴잇은 없다. 어느 바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를 찾기보다는 어바웃타임의 레이챌 맥아담스를 찾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조금 더 걸어보았지만 특별한 것이 없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편이 낫겠다 싶어 타워브리지를 생각하며 손과 엉덩이에 힘을 주고 눈을 꼭 감았다. 눈을 떴지만 그대로이다. 아, 경주 이 씨 가문은 시간여행 능력이 없구나.


숙소에 돌아와 하루를 정리해 본다. 영화 속 이들과 종일 걸으며 대화를 한 하루였다. 다리에 느껴지는 뻐근한 통증이 호젓한 감정과 어우러져 타고 올라온다. 혼자 하는 여행은 편하고 느끼는 것이 많아 좋아하지만 가끔은 오늘같이 대화 상대가 그리울 때가 있다. 특히 도시나 영화의 한 장면을 지나칠 때면 더욱 그렇다. 영화나 드라마 이야기를 누군가와 함께 나누면서 평범한 거리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면 더욱 좋은 여행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은 나와 대화하고 싶지 않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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