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도는 이미 시작되었다

by 이재현

바르도는 흔히 죽은 뒤에 들어가는 어떤 세계로 이해된다. 삶과 다음 삶 사이의 중간 지대, 의식이 방황하는 사후의 통로. 그러나 '티벳 사자의 서'를 삶의 언어로 읽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전혀 다른 깨달음에 이른다.

바르도는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상태라는 사실이다.


바르도란 본래 ‘사이’의 상태다. 익숙했던 것이 무너지고, 아직 새로운 것이 오지 않은 시간. 정체성은 흔들리고, 방향은 잠시 사라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바르도를 언제 경험하는가. 죽음의 순간에만 그런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수없이 바르도를 지나왔다. 이별의 순간, 실패의 한복판, 은퇴 이후의 공백, 상실 뒤의 공허—그 모든 순간이 바르도였다.


문제는 우리가 그 상태를 바르도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그 시간을 ‘공백’, ‘실패’, ‘낭비’로 규정하며 빨리 벗어나려 한다. 빨리 정상으로 돌아가야 하고, 다시 예전의 나로 복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바르도의 본질은 복구가 아니라 전환이다. 바르도는 이전의 내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알리는 신호다.


바르도를 이미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상태에서 길을 잃는다. 불안은 커지고, 판단은 흐려지며, 외부의 확실한 답에 집착하게 된다. 사자의 서가 경고하듯, 알아차림이 없는 의식은 환영에 휘둘린다.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바르도임을 모른 채 바르도를 통과하면, 우리는 같은 삶의 장면을 반복하게 된다.


반대로, 바르도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혼란은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 되고, 공백은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이 된다.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놓아야 하는가를 묻게 된다. 바르도는 불행의 구간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문턱이다.


죽음의 바르도와 삶의 바르도는 다르지 않다. 죽음의 순간에 나타난다는 혼란과 환영은, 삶에서 충분히 연습되지 않은 의식의 결과다. 그래서 사자의 서는 죽음의 순간을 가르치면서, 사실은 삶의 순간을 훈련한다. 지금 이 불확실함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을 실체로 착각하고 있는가.


바르도는 이미 시작되었다.
지금 흔들리고 있다면, 지금 길을 잃은 것 같다면, 지금의 내가 더 이상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신호다. 삶이 다음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는 알림이다.


이 장의 끝에서 우리는 한 가지 선택 앞에 선다.
바르도를 회피할 것인가, 통과할 것인가.

바르도를 통과한 사람만이 다음 삶을 산다. 그리고 그 통과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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