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도 내 삶에서는 주연

by 이재현

중학교 시절 나의 별명은 감초였습니다. 감초는 ‘약방의 감초’를 말하며, 한약을 지을 때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약초입니다. 감초는 약간 달짝지근한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릴 적 한약을 달이고 남은 찌꺼기에서 감초를 골라내어 씹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약방에서 감초는 누군가의 약 안에서 약의 효과를 도와주는 약재이기에 사람에게 분명 유익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나는 친구들이 지어준 감초란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약방에 감초를 여기저기 다 끼는 약간 경망스러운 사람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학창 시절의 나는 키가 작았고 좀 빠릿빠릿한 편이었습니다. 시내버스에 남들보다 재빠르게 올라가서 민첩하게 나의 자리를 확보합니다. 성격도 쾌활하고 몸도 가벼운 데다 나름 운동신경도 발달해 까블까블해 보였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나를 약은 녀석이라 했습니다.

학교에서 했던 적성검사에서 나에게 어울리는 직업은 ‘비서’였습니다. 비서는 여자가 하는 직업이라고 여겼었던 나는 검사 결과를 무시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장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하려면 비서가 사장보다 더 똑똑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도 유능한 비서였으니까요.

나는 국어나 영어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수학이나 과학은 잘했습니다. 수학이나 과학은 원리를 찾아내서 그것을 이해하고 적용하면 됩니다. 국어와 영어의 원리를 찾아내려고 나는 무던히 애를 썼지만 실패하였습니다. 어학은 많이 읽고 쓰고 외워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 했고, 외우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느낌이 어떠세요? “라는 질문이 나에겐 고역입니다. 나는 느낌을 잘 찾아내지 못합니다. 아마 느낌이 없는 모양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질문을 받는 것이 마음이 편합니다. 오랫동안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의 감정이 무엇인지를 나는 몰랐습니다. 보고 싶은 것이 사랑인지, 만나면 헤어지기 싫은 것만 가지고 사랑한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랑을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이해하고 사랑을 정의하였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사랑이란 대상을 위하여 나를 정신적으로 성장시키려는 의지이고 노력이며 행동입니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며,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나는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위하여 나를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나는 또 나를 사랑합니다.

사진에 찍히는 나의 모습들이 맘에 안 들 때가 있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의 모습은 웃음 띤 모습인데 나의 모습은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마 세상을 따뜻하게 대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일 년 후에는 나도 환한 모습으로 사진에 찍히겠노라고. 나는 마음이 그리 따뜻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따뜻한 사람이 좋고,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따뜻한 사람인 척이라도 하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다음 생이 있다면 감정과 느낌이 풍부한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에너지가 펑펑 넘치는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습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삶을 대해 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감초’라는 별명을 40년 만에 만난 동창이 다시 나에게 상기시켰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번 생애는 세상에서의 나의 역할이 조연인 것 같습니다. 상대의 삶에서 주연 배우가 연기에 충실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약방의 감초처럼 각자의 삶이 달달한 맛이 나도록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는 주연보다 더 멋진 삶을 살아간 사람들도 많습니다. 조연도 내 삶에서는 주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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