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goBooks_우고의 서재
정말 오랜만에 책 한 권을 끝냈다. 완독을 한다는 게 이렇게나 힘든 일이었던가. 2020년은 코로나 때문에라도 목표 100권을 쉽게 달성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2019년 보다 독서량이 줄어버렸다. 이제라도 한 권 한 권 읽어내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이병률 작가는 내게 있어 큰 도전을 준 사람이다. 예전에도 이야기한 적 있지만, 군대에서 읽었던 <끌림>이라는 책 덕분에 나는 책을 쓰고 싶어 졌고 부끄럽지만 작가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군대에 있었을 때 <끌림>은 내게 위로였고 따뜻함이었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함을 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읽은 <바다는 잘 있습니다>도 똑같이 내게 위로가 되었고 마음을 참 따뜻하게 만들어줬다. 그중 가장 좋았던 시를 하나 소개하려 한다.
<68~69p �>
미신
필명을 갖고 싶던 시절에
두 글자의 이름 도장을 갖고 싶어 도장 가게에 가서
성과 이름을 합쳐도 두 글자밖에 안 되는 도장을 파려고 하는데
돈을 적게 받을 수 있느냐 물었다.
하지만 남들보다 더 많은 여백을 파내야 하는 수고가 있으니
오히려 더 받아야겠다는 도장 파는 이의 대답을 들었다.
다 늦은 그날 밤
술 마시고 집으로 가는 길
한 잔만 더 마시면 죽을 수도 있고
그 한 잔으로
어쩌면 살 수도 있겠다 싶어 들어간 어느 포장마차에서
딱 한 잔만 달라고 하였다.
한 잔을 비우고 난 뒤 한 병 값을 치르겠다고 하자
주인이 술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당신이 취하기 위해 필요한 건 한 잔이 아니었냐며
주인은 헐거워진 마개로 술병을 닫았다.
바지 주머니엔 도장이 불룩하고
천막 악 전구 주변에선 날파리들이 빗소리를 냈다.
도장을 갖고도 거대하고도 육중한 한 시절의 어디에다
도장을 찍어야 할지 모르는 나는
온통 여백뿐인 청춘이었다.
여백이 무겁더라도 휘청거리지 말고
그 여백이라도 붙들고 믿고 수고할 것을
그 여백에라도 도장을 찍어놓을 것을
<Hugo ✒>
남들보다 더 많은 여백을 파내야 겨우 만들 수 있었던 도장이 마치, 내가 전공과는 전혀 다른 쪽의 일을 선택했기에 발생한 기회비용처럼 느껴졌다. 남들 보다 더 커져 버린 여백이 가끔은 너무나 두려웠었다. 내가 이 여백에 나만의 색으로 칠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정말 열심히 그 여백에 도장을 찍어왔다. 그 큰 여백 위 한 번은 왼쪽 가장 모서리에 하나, 그 뒤 중앙에 하나, 그다음엔 그것보다 조금 아래에 하나. 지금 이 시를 읽고 글을 쓰려고 앉아 있는 지금 그 여백을 꺼내어 보니, 찍혀 있는 도장이 하나의 그림으로 변해있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고, 늘 불안함 속에 살았고,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용기도 없었던 내 청춘 시절. 나는 그럼에도 내 도장을 내 여백에 찍어왔던 것이다.
이제는 그 여백에 함께하는 다른 이들의 도장이 내 도장과 함께 어우러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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