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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효민 Feb 08. 2021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마주하다

나에게도 은사(恩師)가 있었으면 좋겠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마주하다


Ⅰ. 생활기록부를 열람해보다

 뉴스를 통해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온라인 상에서 열람해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15년 전의 일이 되어버린 고등학교 시절이 문득 그리워졌다. 내 생활기록부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남아 있을까.


나이스 대국민서비스를 이용해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열람할 수 있다.


 '나이스 대국민 서비스'에 접속하여 '홈에듀 민원서비스'로 접속하면 고등학교 시절의 생활기록부와 성적을 열람해볼 수 있다. 하지만 나처럼 과거의 자신이 궁금한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어젯밤에 접속했을 때는 40,000명 가까운 접속 대기자가 있어서 대기 시간이 무려 14시간에 육박했었다. 그나마 출근하여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접속했을 때는 1300명 정도만이 대기하고 있을 뿐이어서 금방 접속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대기 인원은 많고 시간은 길다


 로그인에 성공하자 추억 속의 교복과 안경잡이 젊은 친구가 눈에 들어왔다. 나의 모습이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마른 모습이 낯설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이 진짜 나 인지, 지금의 모습이 진짜 나 인지 잘 모르겠다. 

 생활기록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가장 궁금했던 부분을 먼저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1, 2, 3학년 때 담임 선생님들이 남긴 나에 대한 평가였다. 그 부분을 찾기 위해 마우스 휠을 열심히 내리는데 성적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용의 꼬리는 의미가 없다. 뱀의 머리가 되겠다"는 포부로 하향 지원해 진학한 고등학교였다. 하지만 몇 차례 나누어 치러진 배치고사 중 한 번을 응시하지 않았다. 교회 수련회를 가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바보 같은 선택이었고 내 고등학교 생활 모든 부분을 꼬이게 만들어 버린 선택이었다. 특반에도 못 들어간 나는 고등학교 내내 공부에 흥미를 잃고 뱀의 머리가 아니라 뱀의 몸통이 되어버렸다. 성적표를 보니 그 시절이 떠올라 조금은 가슴이 아파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일궈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과거는 늘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조금 더 스크롤을 내려보니 완전히 기억 속에서 잊혀진 수상경력이 나왔다. 내가 논술경시대회, 영어경시대회, 학급우수상을 받았었단다. 정말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조만간 고향집에 내려가면 상장 모아둔 파일철을 찾아봐야겠다. 확실한 건, 저때부터 그래도 글쓰기를 좋아하고 글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다. 

나도 모르는 수상 기록들


 드디어 내가 알고 싶었던 담임선생님들의 날 향한 평가가 적혀 있는 페이지까지 내려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금방 다른 페이지로 화면이 넘어가버린다. 휠을 급하게 다시 올려본다.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허탈감만 주는 나를 향한 평가

 "거짓말... 이게 진짜 끝이라고?"

 무척이나 허탈했다. 경상북도 남고의 담임선생님에게 두 줄 이상의 평가를 기대했던 것은 나의 지나친 욕심이었던 것일까. 회사의 다른 직원의 종합 의견을 보니,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써 준 글이 내 3년의 기록보다 더 길었다. 나는 이 기록을 보기 위해 40,000명, 15시간의 기다림을 견디려고 했던 것이었다.




 Ⅱ. 나에게도 은사(恩師)가 있었으면 좋겠다

 매년 5월 15일이 되면 모교를 방문해 은사(恩師)님을 만난다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부럽기도 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마음이 들곤 했다. 대한민국이 365일에 그토록 다양한 '00의 날'이 있지만 '스승의 날'만큼은 정말 나와 관련이 없는 날처럼 느껴졌다. 나는 단 헌 번도 스승의 날에 졸업한 학교를 찾아가 본 적이 없고, 감사한 스승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선물을 드려본 기억이 없다. 다만 이런 말만 반복했을 뿐이다.


 "나도 찾아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 은사(恩師)님이 계시면 좋겠다" 


 학창 시절에 스승의 운이 없었으니,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스승이라는 존재가 학교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실제로 스승의 날이 되면 선생님이 아닌 직장에서 만난 대표 혹은 기관장을 찾아뵙거나, 사회생활의 처음을 알려준 사수를 만나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친구들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직장에서 만난 누군가에 의해 퇴사를 결심하게 된 안 좋은 기억들만 만들어졌을 뿐.

 

 그러던 중 내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이 된 날이 지금도 기억난다. 스승의 날만 되면 친구들과 함께 모교를 찾아가는 우리 형 때문이었다. 그 해 스승의 날에도 은사님을 찾아뵙는 형에게 나는  이렇게 하소연을 했다. "형은 매년 찾아갈 수 있는 선생님이 있어서 좋겠다" 그 말에 돌아온 답변이 진정한 '우문현답'이었다.


 "그게 그렇게 억울하면, 니가 좋은 스승이 되면 되잖아"




 Ⅲ. 불만이 아닌 충만으로 가는 여정

 형에게 들은 그 한 문장이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받기만을 기다리던 수동적인 삶에서 주는 것이 가능한 능동적인 삶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생각해보니 형의 나긋나긋한 한 마디가 나의 나쁜 모습을 바꿔 놓은 게 한 둘이 아니었다.

 군대를 다녀온 다음부터 내가 걷는 길은 '평범하지 않은 길'이었다. 전공이 무역학과였으면서 연계전공으로 '문화유산해설전공'을 이수하기 시작했고 친구들이 무역실무와 비즈니스 영어 등을 공부할 때, 나는 동양미술사, 한국건축사, 문화인류학 등을 공부했다. 친구들이 '00상사', '00홀딩스'에서 인턴생활을 할 때, 나는 '전통문화진흥원'에서 인턴 생활을 했다. 대학시절 나는 '미운 오리 새끼'였다.

 나는 나만 돌연변이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주변에 나 같은 케이스는 전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로에 대한 고민이 생기고, 운 좋게 취업한 후에는 업무를 하면서 문제가 생길 때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 답답하고 외로웠던 시기를 거치면서 결심했던 것 같다. 나 같은 '미운 오리 새끼'들에게 스스로가 오리가 아님을 알게 해 주자는 결심을 말이다.


 이런 결심 이후로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같은 고민을 공유하고, 정답이 아닌 대안들을 소개해주는 활동들을 이어가고 있다. 아직도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은 분야이지만, 내가 걸어오고 내가 경험한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놔눠주고 있다. 또한 출판사를 운영해보고 독립출판을 해본 경험들을 토대로 도전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도 하고 있다.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얼마나 도움이 될지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100명이 내 이야기를 듣고 99명이 "알지도 못하는 게 입만 살았다" 할 지라도, 단 한 명이 자기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고 용기를 낼 수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 참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행복이 나에게는 '은사'가 없다는 불행을 지워줄 지우개가 될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며, 나는 결심한다. 내가 만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서로를 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절대 성의 없는 한 줄의 문장을 쓰지 말자고. 내게 있어 그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나열하여 기억하며 살아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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