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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초록 Oct 12. 2023

너는 두 줄로 나타났지 - 4

죽음과 소녀: 좋은 시절 다 갔네


좋은 시절 다 갔네


임신 7주차, 본격적으로 입덧이 시작되면서 나는 결국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을 사진첩에서 지웠다.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면서 우아하게 몸을 굽히고 있는 마리아를 보니 신성모독이고 뭐고 같은 여자로서 속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야, 정신차려. 주님의 은총같은 소리에 낚이지 마. 너는 이제 곧 입덧을 겪게 될 것이고,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이건 이제 고통의 시작이라고 하더라.


보통 입덧이라고 하면 한밤중에 느닷없이‘자기, 나 딸기 먹고 싶어. 당장 나가서 사와.’같은 소리를 하며 남편을 깨운다거나, 평소 잘 먹던 음식 냄새를 맡고는 헛구역질을 하며 화장실로 달려가는 여자를 상상하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드라마의 영향인 것 같은데, 사실 현실의 입덧이란 이런 것이다. 당신은 전날 밤에 피자를 안주로 보드카와 데낄라를 섞어 진탕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먹은 피자가 금방이라도 올라올 것 같고, 두개골 안에서 뇌가 출렁거리는게 느껴지는 것처럼 머리가 아프다. 근데 이제 그 상태로 통통배를 타고 바다를 건넌다. 한 달 내내. 물론 두통과 구토감을 동반한 숙취도 한 달 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전날 술이라도 마시고 놀았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물론 입덧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입덧이 아예 없었다는 사람도, 만삭까지 매일 구토와 어지럼증에 시달리며 누워 있었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제일 무서운 것은, 입덧은 지금부터 벌어질 일의 시작일 뿐이라는 것이다. 호르몬이 변하면서 사타구니와 겨드랑이가 거뭇거뭇해지고, 몸 여기저기 땀띠같은 발진이 돋고, 임신소양증으로 수시로 몸 여기저기를 벅벅 긁어댄다. 자궁이 커짐에따라 방광이 눌려 한 시간 간격으로 화장실을 가야 하고, 골반저근이 당겨 앉기도 서기도 힘든데 밤만 되면 꼬리뼈가 살을 찢고 튀어나올듯 아파서 제대로 누워 잘 수도 없다. 부풀어 오른 배로 인한 소화불량이나 하지부종, 신경쇠약은 고통으로 쳐 주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내가 내 몸을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내 몸의 주인은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서른 네 해 동안 나를 위해 움직였던 뼈와 살과 근육과 호르몬은 이제 뱃속에서 자라나는 태아를 위해 작동했다. ‘나’라는 존재가 벌써부터 뒤로 밀리는 느낌이었다. 너무 힘들어 ‘빨리 낳아버리고 싶다’라고 말할 때마다,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편해.’임신과 출산을 끝내면 이제 육아가 닥쳐온다는 것이다. 둥그렇게 불러온 내 배를 보며 우리 엄마는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우리 딸 이제 좋은 시절 다 갔네.”맙소사. 마리아는 과연 이 모든 것을 주님의 종이란 마음으로 받아 들일 수 있었을까.



한스 발둥 그린, <죽음과 소녀>, 1518-20. 바젤 공공 박물관


죽음과 소녀


수태고지와 다루고 있는 내용은 완전히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인외존재 + 소녀’의 조합을 다룬 인기 주제가 있었다. '죽음과 소녀’는 중세부터 널리 그려지던 주제로, 육체의 젊음과 아름다움의 덧없음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육체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소녀는 보통 나신으로 그려지곤 하며,’죽음’은 주로 움직이는 백골 귀신으로 나타나  소녀를 끌고 가는 중이거나,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거나,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는 모래시계를 들고 서 있거나 한다. 아름다움과 젊음을 마음껏 누리던 소녀에게 죽음이 임박했다. 매끄럽고 포동포동한 소녀의 몸은 곧 쪼그라들고 부패하여 종국에는 사신과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좌: 미하엘 볼가무트, <죽음의 무도>, 1493                           우: 아드리안 반 위트레흐트, <꽃다발과 해골이 있는 정물화>, 1642


14세기 중엽 흑사병이 유럽을 쓸고 간 이후 인간의 삶과 부귀영화, 아름다움 같은 가치들이 죽음 앞에 얼마나 허망한지를 나타내는 예술 작품들이 유행하게 되었다. 고관대작의 해골들이 무덤 위에서 춤을 추는 ‘죽음의 무도’나 해골, 모래시계, 시든 꽃과 썩은 과일이 그려진 ‘바니타스 정물화’또한 같은 정서를 담은 주제다.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제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도, 세상을 발 아래 두었던 제왕과 부를 과시하던 거상도 죽음 앞에서는 공평하게 썩는다. 이러한 메세지를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인 라틴어 문구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부른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출신 여성 화가 마리안 스톡스의 1908년 작품 <죽음과 소녀>에서 ‘메멘토 모리’의 모티프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 작품은 전통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죽음과 소녀’를 다루고 있다. 죽음은 해골이 아니라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날개를 단 사신(死神)으로 묘사된다. 사신은 모래시계나 거대한 낫 대신 고요하게 불이 타오르는 작은 랜턴을 들고 소녀의 침실을 방문한 참이다. 사신은 무언가를 선고하듯 소녀의 얼굴 쪽으로 손바닥이 향하도록 왼손을 들고 있으며 소녀는 젊고 아름다운 나신을 뽐내는 대신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있다. 두려움과 불신이 가득 담긴 눈빛과 살짝 벌린 입술은 사신에게 무언가를 되묻는 듯하다. 


마리안 스톡스, <죽음과 소녀>, 1908, 오르세 미술관, 파리


어쩐지 익숙한 장면이지 않은가? 그렇다. 수태고지다. 소녀의 입에서 ‘저 임신이라고요? 확실해요?’ 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지 않은가. 사신의 옷과 날개가 흰색이었다면 이 작품은 논란의 여지 없이 ‘수태고지’로 해석 되었을 것이다. 나조차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때‘어 이건 수태고지인데?’ 하고 작품 태그를 다시 확인했었으니까. 재미있는 것은, 마리안 스톡스가 그린 <수태고지>는 오히려 전통적인 ‘ 죽음과 소녀’와 더 유사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천사는 마리아를 마주보며 하늘에서 가져온 소식을 전하는 대신 가만히 서 있는 마리아의 뒤로 안개처럼 조용히 나타난다. 입을 굳게 다물고 서늘한 표정으로 마리아를 내려다보는 천사는 섬뜩하게 보이기도 한다. 


사실 생각해보면‘수태고지’와 ‘죽음과 소녀’는 비슷한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에게 어느날 갑자기 이 세상의 인물이 아닌 존재가 나타난다. 이 존재가 통보하는 하는 것은 한 개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버거운 숙명이지만, 거부할 방도는 없다. 유대사회에서는 여자의 혼전 성관계를 간음으로 치부하고, 간음한 여자는 거리로 끌어내어 돌로 쳐죽이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니 마리아는 비유적인 죽음이 아니라, 이 임신을 통해 진짜 죽음을 맞이했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마리아의 눈에는 임신을 전하러 온 천사가 마치 죽음의 사자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마리안 스톡스가 왜 수태고지의 구도를 빌려 죽음과 소녀를 묘사했는지 명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작가 본인이 이 작품에 대하여 이렇다할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며 관련 연구도 미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서야, 아이를 가지고 임신에 대한 공포를 경험한 다음에서야 나는 작가의 의도를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여성 화가인 마리아 스톡스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임신은, 한 여자의 인생에 죽음만큼의 변화를 가지고 오는 것임을. 앞으로 내가 우선으로 생각하게 될 성장과 발전은 나의 것이 아니라 뱃속의 이 아이를 위한 것이겠지. 물론 임신과 출산이 내 목숨을 끊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힘든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제 내 한 몸뚱이만 챙기면 되던 시절은, 엄마가 말하던 그 ‘좋은 시절’의 나는 죽은 것이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수면부족과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아기 엄마로서의 새 시절을 버리고 예전의 그 '좋은 시절'로 돌아갈거냐는 질문 앞에 '그렇다' 고 말할 엄마는 거의 없을 것이다. '좋은 시절'은 갔지만 아이와 함께 하는 나의 지금은 '더 좋은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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