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ro 4
아카데미를 나와 홍대의 밤거리를 걸었다. 찬 바람이 얼굴을 스쳤지만, 전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했던 무거운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 두 선생님의 말은 명확했다. 더 이상 도망치지 말아야 했다. 내 감정과 마주하고 나가아햐 했다.
"다시, 그녀를 찾아갈 준비를 해야 해."
다짐을 하듯 혼잣말을 했다.
결과가 두려워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가 되는 건 이제 싫었다. 이제는 책임을 져야 할 때다.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까.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도망칠 수 없었다.
그때, 문득 머릿속에 한 마디 말이 떠올랐다.
'한 걸음 더 내딛지 않으면, 결국 제자리일 거야. 지구와 달은 서로 떠날 수 없으니까.'
깊은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자 바람 때문에 손이 시렸다. 견딜만했다. 그녀가 느꼈을 아픔에 비하면, 이건 별 게 아니었다. 부디 사은(四恩)님께서 수호하시길, 배은망덕한 내가 빌었다. 자판 위로 움직이는 손이 떨렸다. 차가워진 손 때문에 화면이 잘 눌리지 않았다. 미끄러지는 손가락을 진정시키며 문자를 완성시켰다.
[엘리아나님, 당신과 춤을 출 때 저는 평온을 느낄 수 있었어요. 당신은 나의 구원입니다. 제발 나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세요. 한 번만 이야기 나눠요.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부탁합니다.]
문자를 완성하고, 다시 한번 내용을 확인했다. 읽을수록 비참해지는 문자였다. 잠깐이지만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굽혀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리웠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그녀의 존재를 느꼈다. 탱고는 절대 혼자 출 수 없는 춤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부재는 존재의 증명이란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부재는 내 삶 속에서 가장 강렬한 존재의 증명이었다. 어쩌면 나의 모든 선택들이 이와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반복되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서러웠다. 또한, 엘리아나에게 닿지 못한 미안함과 후회가 차가운 공기 속에서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눈물을 날렸다. 바람이 스치며 눈물이 차갑게 말랐다. 시린 바람에 볼이 따가웠다. 따끔거리는 볼을 쓰다듬었다. 어쩐지 자윤이 떠올랐다. 정말, 어쩌면, 자윤 또한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자윤이 뺨을 때리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참고 참고 또 참았던 것처럼, 엘리아나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나는 항상 상대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면서도, 정작 나는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았다. 자윤의 손을 놓은 것은 나였다. 그녀가 내게 바랐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게 다른 걸 바라지 않았다. 그저 함께 하자고 했었다. 평생을 같은 길로 나아가자고, 우리의 원대한 꿈을 이뤄내자고 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혼자서 다른 생각을 했었다. 그녀가 이 길을 그만두고, 나와 함께 하기를, 나를 지지해 주고 지원해 주기를, 혼자의 꿈이 아닌 우리의 꿈으로써 함께 하기를 바랐다. 그 모든 생각들의 중심에는 내가 있었다. 내가 바라는 것만 있었고, 내가 가지고 싶은 것만 있었다. 있는 그대로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던 건 오히려 그녀였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참다 참다가 선택한 선택이 지금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 기분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항상 상대보다 나를 먼저 떠올리면서 사랑이란 말을 했다. 그 사랑의 크기를 비교했다. 작고, 크고, 하찮고, 숭고하고. 정작 나는 무엇도 포기하지 않고, 주지 않았다. 받기만 했고, 가지려고만 했다. 무언가를 내어준 적이 없었다. 나를 지지해 주고, 나를 위해 희생해 주길 바라면서도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항상 책임지기보단 도망쳤다. 모든 것의 중심에는 늘 내가 있었다.
바람을 맞으며 시린 손으로 핸드폰을 붙잡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답장이 올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이건 일종의 스스로에게 주는 벌이자 속죄였다. 자윤의 눈물과 엘리아나의 상처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견딜 만했다. 설사, 답장이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늘 자정이 지나기까지는 버틸 심산이었다. 그래야 그나마 나의 죄가 조금은 가벼워질 것만 같았다. 발끝은 점점 얼어붙었고, 얼굴은 바람에 따갑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꼼짝하지 않고 주머니 속 휴대폰만을 쥐고 있었다. 이 시간을 견디지 않는다면 답장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지금에 와서 할 수 있는 건 오직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식어가는 체온을 지키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며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눈물이 찔끔 났지만 삼키며 버텼다. 시간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느리게 흘렀다. 오만가지 생각에 머리가 뜨거웠다. 몸은 추웠지만, 머리는 불타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찬 바람이 고마웠다. 머리를 식혀주었기에 다행이었다. 몸은 떨렸지만 정신은 차릴 수 있었다. 몸이 덜덜 떨려 온몸에 힘을 줬다.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문자의 주인은 엘리아나가 아닌 에밀리아였다.
[아까는 당황해서 제대로 말을 못 했어요. 혹시 오해할까 봐 문자 남겨요. 루크와는 사실 예전에 끝난 사이예요. 루크만 연애 중이라고 하는 거지, 저는 끝난 사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잘 생각해 봐요. 이번 기회에 새로운 파트너십을 시작할 수도 있으니까요.]
메시지를 확인한 뒤 핸드폰 화면을 닫았다. 답장은 하지 않았다. 내가 벌려놓은 일들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결국 모두에게 상처를 줬다. 스스로가 못할 짓을 한 것처럼 느껴져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이 모든 건 내가 책임져야 할 문제였다. 다시 핸드폰을 꼭 쥐었다. 엘리아나의 답장을 기다리며 시린 바람 속에서 몸을 움츠렸다.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소란스러운 소리들은 마음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자정까지 십 분이 남았다. 몸은 완전히 얼어붙었고, 입술은 파랗게 변해 있었다. 손끝은 감각이 없어졌고, 이가 맞부딪히며 딱딱 소리를 냈다.
모든 걸 체념하려던 순간, 주머니에서 또 한 번 진동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