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ro 10
연훈의 대답이 끝났을 때, 나는 혼란스러웠다. 듣는 동안 고개는 저절로 끄덕였지만, 가슴 한켠에서는 묘한 반감이 일었다. 이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만 해도 그들의 말을 참고 삼아 마음을 고쳐 먹자고 다짐했는데, 막상 연훈의 답을 듣다 보니 고개를 숙여 수용하던 ‘나’는 사라지고, 오히려 대화에 끼어들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든 사람이 있었다.
그가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집착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라 말했을 때, 왜 그렇게 불편했을까. 정말 사랑은 집착의 변형일 뿐일까. 내가 했던 사랑은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뿐이었을까. 그걸 인정하는 순간, 내 과거가 무너질 것만 같았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동안 진짜 사랑을 한 적이 없는 걸까.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니, 어느새 나는 토크 콘서트의 흐름에 개입하고 있었다. 연훈의 질문에 대답한 것도 모자라, 토론의 방향을 틀어버리려는 말까지 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이 뒤엉켜 있을 때, 자윤의 차례가 돌아왔다. 장내를 차분히 다독인 연훈이 다음 질문을 읽었다.
"다음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어떻게 보면 가장 이 콘서트에서 핵심일 거 같네요. 사연을 직접 들으면 좋겠으나 아쉽게도 익명의 질문입니다. 진솔한 답변 부탁드리겠습니다. 준비되셨나요, 자윤 교무님?"
연훈이 너스레를 떨며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자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묻겠습니다. 진실한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그의 질문이 자윤에게로 건네지자 모두의 시선은 그녀에게로 향했다. 분명 준비된 질문, 준비된 답변, 준비된 시간이었음도 그 순간, 무대 위 자윤의 표정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녀가 긴장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진실한 사랑..."
자윤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사실,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문학과 철학은 오랫동안 사랑을 정의해 왔죠. 어떤 이는 에로스와 아가페로, 또 어떤 이는 헌신과 배려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고 해서 우리가 ‘진짜 사랑’을 하고 있는 건 아니더군요.”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원고를 살짝 접었다.
“처음엔 이 질문에 또렷한 정의를 드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사랑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를 하며 말해 보려 합니다.”
순간, 긴장했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우리 이야기를 꺼낼 것이라는 사실을.
"저는 과거에 사랑을 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묵혀둔 감정이 서서히 깨어나는 듯했다. 손끝이 저릿해졌다.
“종교적인 삶 안에서도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 사랑은 제 삶을 흔들었고, 저를 오래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행복하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이 ‘반드시 나와 함께’여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집착 속에서 저는 그것을 사랑이라 믿었죠.”
자윤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이 내 가슴을 깊게 찔렀다. 내가 했던 말과 행동들이 연쇄처럼 떠올랐다. 그녀는 내 선택을 믿고 존중하려 했다. 하지만 그걸 사랑이라 여기지 않았다. 늘 그녀가 내 곁에 있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진실한 사랑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의 삶을 지켜봐 주는 일입니다.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 삶이 온전해지도록 기도해 주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내 곁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니더군요.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놓아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길에서 자라날 수 있도록 멀리서라도 응원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신념을 공유했고, 같은 미래를 꿈꿨기에 이 사랑이 당연히 영원하리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녀가 잠시 객석을 둘러본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인다.
“그땐 그 사람이 내 인생의 전부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영원히 머물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알게 됐습니다. 진짜 사랑은 상대를 내 곁에 두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온전히 존중하는 일이라는 걸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녀의 말 한 줄 한 줄이 칼처럼 들어왔다.
“그의 행복을 바라면서도, 그 행복이 ‘나와 함께’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삶이 그의 것이 되도록 믿고, 기도하는 일. 그가 자신의 길을 걸어가도록 돕는 일. 그것이 진짜 사랑임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시선을 떨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너무 쉽게 ‘내 것’이라는 말을 씁니다. 내 사람, 내 사랑. 하지만 누군가가 정말 ‘내 것’일 수 있을까요? 우리는 타인의 삶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정말로 그를 사랑한다면, 그의 선택을 믿고, 그의 경험이 온전해지도록 기도하는 것—그게 진실한 사랑 아닐까요?”
그녀는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어디에 있든 어떤 길을 가든, 그가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믿고 기도해 주세요. 그 믿음이 바로 진짜 사랑일 테니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객석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깐의 정적 뒤, 작은 박수가 커다란 파도로 번졌다.
나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정말 그녀를 사랑했던 걸까, 아니면 내 욕망을 사랑했던 걸까. 곱씹을수록 혼란은 짙어졌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녀는 나와 같은 곳에 서 있지 않았다. 이미 다른 곳으로 나아가 있었다. 나는 아직도 사랑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이제 달라져야 했다. 그녀의 마지막 문장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진실한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이다.’
눈을 감았다. 손끝이 저리고, 심장이 빨라졌다. 너무도 당연한 말 같으면서도, 끝내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이었다.
나의 사랑은 온전했을까. 아니, 나는 사랑을 한 적이 있었던 걸까.
그녀를 붙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변명을 만들었는지 떠올랐다. 그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보낼 수 없었다고. 그러나 그녀는 지금 내 앞에서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사랑일 수는 있지만, 진실한 사랑은 아닐 수 있다고.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붙들고 있었던 걸까?
무대 위의 자윤은 여전히 차분했다. 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제 확실해졌다. 그녀는 나와 같은 곳에 있지 않았다. 이미 나를 떠나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여전히 이 자리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그때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