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초(Ocho) ― 반복 속에 깃든 변화의 춤

오초(Ocho)

by 양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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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에서 가장 많이 접하고, 가장 많이 연습하는 동작 중 하나는 단연 ‘오쵸(Ocho)’다. 스페인어로 ‘8’을 뜻하는 이 동작은 팔로워가 팔자(8) 모양으로 발을 움직이며 회전하는 패턴을 말한다. 크게 오쵸 아델란트(ocho adelante, 앞 오쵸)과 오쵸 아틀스(ocho atrás, 뒤 오쵸)로 나뉘는데, 전자는 상대방을 향해 다가가며 걷는 회전이고, 후자는 상대방을 향해 등을 돌리며 물러나는 회전이다. 이 오쵸는 단독으로도 사용되지만, 히로나 볼레오, 빠라다, 샌드위치 같은 다양한 동작과도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동작 하나하나가 이어져 흐름을 만들기 때문에, 오쵸는 단순한 회전이 아닌, 탱고의 연결과 호흡을 위한 기본기라 할 수 있다.

오쵸는 '8'이라는 뜻처럼 회전과 회귀, 그리고 순환의 의미를 품고 있다. 한 번 시작하면 그 안에서 무한히 이어질 수 있고, 일정한 패턴 안에서 자유롭게 방향을 바꿔가며 춤을 만든다. 마치 하나의 세계 안에 있는 두 사람이 끝없는 궤도를 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탱고를 오래 추다 보면 이 오쵸가 탱고라는 굴레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굴레 안에서는 파트너와의 만남, 음악과의 대화, 공간과의 흐름이 끝없이 반복된다. 밀롱가에 가도 그렇다.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비슷한 음악을 듣고, 비슷한 시간에 춤을 춘다. 매번 같은 것 같지만, 단 한 번도 같은 순간은 없다.

반복된다고 해서 그 경험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달라지고, 익숙함 속에서 새로운 감각을 찾아간다. 탱고는 그런 만남과 감각의 반복 속에서 성장해 가는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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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기억이 하나 있다. 탱고를 시작한 지 4개월 차쯤, 용기 내어 처음 밀롱가에 갔을 때였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한 팔로워를 만났다. 그녀의 탱고 네임은 '미나'였다. 처음으로 입성한 밀롱가에, 까베세오가 뭔지 잘 모를 때라(지금도 잘 모르지만). 춤을 추는 게 퍽 쉽지만은 않았다. 혼자서 푸념처럼 까베 참 어렵다, 라고 뱉은 말에 누군가 그렇죠,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까베세오가 살짝 어긋난 채로 어찌어찌 성사된 춤이었다. 내심 떨리던 마음을 안고 첫 발을 뗐는데, 그녀가 내게 물었다. “얼마나 됐어요?” 나는 조심스레 “네 달 됐어요...”라고 말했는데, 그녀의 표정이 순간 얼어붙었다. “아... 큰일났네...”라며 혼잣말하듯 내뱉던 그 반응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딴따는 서로에게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내 리드는 무겁고 투박했고, 그녀는 방향을 잃은 듯 움직였다. 서로의 발이 부딪히고, 중심이 흔들리고, 음악은 흘러가는데 몸은 흐르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무겁게 춤을 마치고,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속으로 ‘다신 안 만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6개월쯤 지나서 다시 같은 공간에서 그녀를 만났다. 나는 여전히 부족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아졌다고 느끼던 시기였다. 예상치 못하게 그녀가 까베세오를 받아줬고, 우리는 다시 춤을 췄다. 이번엔 달랐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많이 늘었네요. 이젠 좀 춤 같아요!” 나는 민망하게 웃으며 “그날 죄송했어요. 제 리드가 진짜...”라고 말했는데, 그녀는 손을 살짝 흔들며 “아니에요, 다 그런 거죠. 오늘은 즐겁네요”라고 했다. 그날의 딴따는 유난히 부드럽고 따뜻했다. 같은 사람이었지만, 같은 춤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며 우리는 달라졌고, 그 만남도 달라졌다.

그래서 오쵸는 그냥 팔자 모양을 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삶처럼, 무한히 반복되지만 결코 같은 지점을 돌지 않는 나선형의 춤이다. 우리의 사계가 반복되고, 일상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매번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듯이. 탱고는 그 반복 속에서 나의 변화와 타인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예술이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변화의 결을 느끼는 것, 그것이 탱고를 추는 이유이고, 우리가 탱고를 사랑하는 이유다. 우리는 춤추며 성장하고, 만나며 배워간다. 오쵸처럼 계속 돌아가는 인생 속에서도 우리는 조금씩 나아간다. 한 걸음씩, 음악을 따라, 심장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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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ngo is a feeling that is danced.”
– Carlos Gavito
(탱고는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춤으로 표현된다.)

탱고는 단지 움직임이 아니다. 탱고는 삶이다. 반복되지만 다르고, 익숙하지만 낯설고, 고요하지만 매 순간 새로운 그 춤 속에서 우리는 매번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또 다른 오쵸를 시작한다.
언젠가 다시 만날 그 '팔로워'와, 또 다른 누군가와 함께.

그게 탱고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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