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의 역사] 1920년대, 신파(新派)의 등장

춤추는 발에서 듣는 귀로

by 양희범

1920년대, 신파(新派)의 등장: 춤추는 발에서 듣는 귀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20년대로 접어든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그야말로 ‘폭발’하고 있었습니다. 도시로 몰려든 이민자들, 거리에 울려 퍼지는 라디오와 축음기 소리, 그리고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카바레까지. 이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탱고는 새로운 운명을 맞이합니다.


독일계 오데온(Odeon)과 미국계 빅터(Victor) 같은 거대 음반사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스튜디오를 차리면서, 탱고는 이제 거리의 음악이 아닌 ‘레코드 산업의 핵심 상품’이 되었습니다. 음반사들은 포크 가수들을 스카우트해 탱고를 부르게 했고, 다른 장르를 제쳐두고 탱고를 우선적으로 녹음했죠.


이 시기, 1925년 전후를 기점으로 탱고 역사상 가장 중요한 변화인 ‘라 가르디아 누에바(La Guardia Nueva, 신파)’*가 시작됩니다. 클래식 교육을 받은 젊은 음악가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탱고는 “단지 춤추기 위한 음악”에서 “집중해서 듣는 음악”으로, 발의 유희에서 귀의 예술로 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그 변화의 최전선에 섰던 두 명의 거인, 혁신가 훌리오 데 카로와 제왕 프란시스코 카나로를 만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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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훌리오 데 카로: “탱고도 음악이다”라고 외친 혁명가

바이올린을 든 반항아, 훌리오 데 카로(Julio De Caro, 1899-1980)는 부유한 가정에서 클래식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그가 ‘고상한’ 클래식이 아닌 탱고에 빠져들자, 아버지는 격노하여 아들과의 인연을 끊어버렸습니다. 집에서 쫓겨난 그는 오히려 그 분노를 예술적 에너지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는 “탱고도 음악이다(El tango también es música)”라는 신념 아래, 기존의 단순한 연주법을 완전히 뜯어고쳤습니다.


세스테토(6중주)의 정립: 두 대의 반도네온, 두 대의 바이올린,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이 완벽한 균형을 갖춘 세스테토 데 카로(Sexteto De Caro)*는 이후 탱고 악단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노래하는 바이올린: 그는 바이올린이 단순히 리듬을 돕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성악가처럼 주선율과 대선율을 노래하듯 연주하는 기법을 도입했습니다.

괴짜 발명가: 그는 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해 나팔이 달린 ‘바이올린 코넷’*이라는 기이한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혁신 덕분에 탱고는 복잡한 화성과 우아한 서정성을 갖춘 ‘예술 음악’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2. 프란시스코 카나로: 빈민가에서 파리까지, 탱고 제국의 선장


데 카로가 예술적 혁신가였다면, 프란시스코 카나로(Francisco Canaro, 1888-1964)*는 탱고를 거대한 비즈니스로 만든 사업가였습니다. 우루과이의 가난한 이민자 숙소(콘벤티요)에서 자란 그는, 어릴 때 빈 기름통을 개조해 만든 바이올린으로 연습했을 만큼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탁월한 리더십으로 밑바닥에서 정상까지 기어올랐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탱고 산업의 선장”이라 불렀습니다.


산업화의 주역: 그는 오케스트라에 정식으로 가수를 기용해 ‘노래하는 탱고’의 비중을 늘렸고, 저작권 보호 단체(SADAIC) 설립을 주도하며 음악가들의 권리를 챙겼습니다.

파리 정복: 1925년, 그는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파리로 건너가 도시 전체를 탱고 열풍에 빠뜨렸습니다. 그의 성공은 탱고가 아르헨티나의 ‘국가 브랜드’이자 ‘수출 효자 상품’이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3. 명곡 뒤에 숨겨진 이야기들


① 왕세자가 춤춘 탱고: 「부엔 아미고(Buen amigo)」

훌리오 데 카로의 명곡 「부엔 아미고(좋은 친구)」는 그에게 큰 영감을 준 외과 의사 엔리케 피노키에토에게 헌정된 곡입니다. 하지만 이 곡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영국의 에드워드 왕세자였습니다.

1925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한 왕세자는 갈라 무도회에서 데 카로의 연주를 듣고 감탄해 직접 무대로 나와 탱고를 추었습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데 카로를 따로 불러 연주를 청해 들을 정도였죠.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던 탱고 연주자가, 영국의 왕세자를 춤추게 만든 것입니다.


② 신문 헤드라인이 제목으로: 「카나로 엔 파리스(Canaro en París)」

탱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주곡 중 하나인 「카나로 엔 파리스(카나로, 파리에 가다)」. 제목만 보면 카나로가 만든 곡 같지만, 사실 이 곡은 알레한드로 스카르피노와 후안 칼다렐라라는 다른 작곡가들이 만든 것입니다.

곡을 완성하고 제목을 고민하던 그들은 우연히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헤드라인을 보게 됩니다.


“Canaro en París (카나로, 파리에 도착하다)”

파리를 정복한 카나로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신문 제목을 그대로 곡명으로 따올 정도였던 것이죠. 정작 카나로 본인은 나중에야 이 곡을 녹음했지만, 이 곡은 그가 이룩한 ‘탱고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영원한 테마송이 되었습니다.


� [Writer’s Note] 요약 및 핵심 정리

1920년대 ‘가르디아 누에바’ 시기는 탱고의 사춘기가 끝나고 성인이 된 시기입니다.

산업의 폭발: 오데온, 빅터 등 다국적 음반사의 진출로 탱고는 거대한 ‘레코드 산업’이 되었습니다.

*라 가르디아 누에바:** 1925년경을 기점으로, 클래식 교육을 받은 연주자들이 유입되며 탱고의 음악적 수준이 비약적으로 상승했습니다.

훌리오 데 카로: 6중주(세스테토) 편성을 정립하고 화성적 깊이를 더해 탱고를 ‘듣는 음악’으로 진화시켰습니다.

프란시스코 카나로: 파리 진출과 저작권 확립을 통해 탱고를 국제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완성했습니다.

(이 글은 1920년대 탱고의 황금기를 준비하던 ‘가르디아 누에바’ 시기의 혁신과 성장을 다루었습니다. 주요 용어에 대한 해설은 아래 미주를 참고해 주세요.)


� [미주] 더 깊이 알기

라 가르디아 누에바 (La Guardia Nueva)*

‘신파(新派)’ 또는 ‘새로운 경비대’라는 뜻.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혹은 1940년대 황금기 직전까지를 일컫는다. 초기(가르디아 비에하)의 원초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음악적으로 세련되고 정교한 편곡을 추구했던 시기.

세스테토 데 카로 (Sexteto De Caro)*

훌리오 데 카로가 정립한 6인조 악단 편성. 2대의 반도네온, 2대의 바이올린, 1대의 피아노, 1대의 콘트라베이스로 구성된다. 이 편성은 이후 탱고 오케스트라의 표준이자 가장 이상적인 균형으로 자리 잡았다.

바이올린 코넷 (Violin-Cornet)*

‘스트로 바이올린(Stroh violin)’이라고도 불린다. 공명통 대신 금속 나팔(Horn)이 달려 있어, 마이크와 앰프가 없던 시절 소리를 증폭시켜 멀리 보내기 위해 사용된 독특한 악기.

콘벤티요 (Conventillo)*

19세기 말~20세기 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 공동 주택. 수많은 이민자가 모여 살던 이곳은 탱고가 탄생하고 성장한 요람이었다. 카나로 역시 이곳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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