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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희범 Apr 22. 2024

메디아 루나 - 살리다 6

자아가 강해서였을까 웬만한 일들은 다 경험해 봤다고 생각했었다. 대학원을 뛰쳐나와 새로운 길을 가게 됐을 때 아쉬 보다 컸던 감정은 반발심이었다. 이 길이 아니면 내가 먹고살지 못할 것 같냐 라고 이야기 했었다. 선배와 후배들에게 두고 보라는 말을 했었다. 그 말이 얼마나 치기 어린 말이었는지는 사회에 나오고 나서야 알게 됐다. 당장 사람을 압사시킬 것만 같은 이 통근길 지하철만 해도 사회는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직장을 구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아는 지인이 운영하는 출판사에 연이 닿아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행운이었다. 인파를 뚫고 지하철에서 내려 회사로 향했다.


사회에 나와서 알게 된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매일 전쟁 같은 현실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매일 아침이 전쟁이었다. 경쟁 없이 그저 편하게 공부하고 기도했던 그때의 시간들이 때때로 그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때의 내가 그리운 것이지 사람들이 그리운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녀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긴 했다. 그녀는 남았고 나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연락이 차단당했기에 연락이 닿지도 않았다. 하지 못하는 일들에 대한 심리적 반발 때문인지 연락이 안 되니 더 궁금했다. 하지만 이제 그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억지로 무언가를 시도해보고 싶지는 않았다. 더 이상 창피를 당하기 싫었다. 어쩌면 나의 사랑이란 그 정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뒷맛이 씁쓸했다. 망상에 얼마나 집중했던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사내 메신저를 확인했다. 새롭게 추가된 업무들과 해결해야 하는 일들을 확인했다. 업무를 확인하는 중에 눈에 띄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아는 사람의 출판 소식이었다.  하필이면 그 일이 내게 배정되다니, 사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일을 맡긴 사장이 원망스러웠다. 가만히 익숙한 이름을 응시했다. 김수호 바오로 신부님,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시던 신부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연히 젊은 성직자 모임에서 만나게 되어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었다.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민하던 성직자는 이제 내일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신부님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담당자를 바꿔달라고 부탁해야겠다. 도저히 신부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자신이 없었다. 이제 해명은 지긋지긋했다. 혹여나 소식이 전해진다면 더 이상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것 같았다.


메시지 창을 닫고 곧바로 일어나 사장실로 향했다. 도대체 이 기획을 내게 배정한 무책임한 사장에게 한 소리를 해야 했다. 서로의 사정을 알고 날 여기로 받아줬으면 끝까지 책임을 졌어야 했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할 거라고 상상도 못 했기에 더 화가 났다. 평소면 금방 도착할 사장실이 오늘따라 멀게 느껴졌다. 자리에 앉아 이쪽을 힐끔 쳐다보는 직원들이 시선이 느껴졌다. 애써 그들의 눈초리를 무시하며 사장실로 향했다. 사장실에 도착하니 사장은 통화를 하는 중인 것 같았다. 유리문 넘어 통화에 정신이 빠진 사장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이리저리 사장실을 걸어 다니며 전화를 하던 사장도 문 앞을 막고 서 있는 거대한 형체를 인지한 모양이었다. 통화 중인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사장이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등을 돌렸다. 그의 태도에 기분이 팍 상했다. 여전히 그가 통화 중임에도 불구하고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그가 잠깐 고개를 돌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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