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의 휴일
하노이에선 뭘 해야 할까? 가이드북이나 블로그에 하노이에서 할 일을 찾으면 하노이를 벗어나 하롱베이같은 주변을 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하노이 안에서 놀고 싶었다. 한국에서도 할 수 있지만 하노이에서 하면 더 좋은 일을 하고 싶었다.
사파에서 떠난 버스가 하노이에 도착했다.
버스는 호안끼엠 호수 근처에 도착했고, 여긴 밤을 즐기는 사람들 덕에 정신없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숙소로 가기 위해 커다란 배낭을 지고 맥주거리를 지나야 한다.
호스텔로 가는 길에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
숙소를 맥주거리 근처의 저렴한 호스텔로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한복판이다.
주말 저녁 하노이 맥주거리는 출퇴근길 신도림역도 울고 갈 정도로 사람이 많다.
사람 한 명도 간신히 들어가는 곳에 파고 들려니 쉽지 않다.
게다가 찾고 있는 호스텔 이름이 구글맵에 없어서 길을 헤맸다.
사람 사이에 끼어 끙끙거리며 지도를 보는 동안 내 옆으로는 산타 분장을 한 수십 명의 서양인들이 지나갔고, 주말을 맞아 베트남 공안이 단속에 나섰다.
공안은 나 한 명 들어갈 자리도 없는 비좁은 골목길을 차로 밀고 들어간다.
상인들은 “폴리, 폴리”를 외치며(아마 police를 말하는 듯) 손님들을 일으켜 세우고 한창 맥주를 마시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테이블과 의자를 안으로 밀고 일어선다(테이블을 거리에 두고 장사하는 것이 불법이기 때문에 공안이 지나가는 동안 의자를 건물로 밀어붙이고 지나 가면 다시 앉는다).
크리스마스 직전의 하노이 맥주거리는 혼돈 그 자체고 그만큼 활기가 넘친다.
내가 머문 1박에 7달러짜리 호스텔은 맥주거리의 모든 흥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새벽까지 쭉 시끄러웠다.
평소라면 잠을 이룰 수 없는 소음이 짜증 났겠지만 오늘은 예외다.
베트남에서 가장 생동감 넘치는 거리에서 소음을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해 본다.
몇 시간 전까지 흥분 그 자체였던 거리에 아침이 찾아왔다.
놀라울 정도로 고요하다.
그 요란함을 본 입장에서 믿기 힘든 차분한 광경이다.
밤에는 맥주집만 보였던 거리가 알고 보니 여행사로 가득하다.
베트남에서 제일 유명한 여행사인 신투어리스트와 그것을 흉내 낸 가짜 신투어들이 늘어서있다.
어렵게 진짜 신투어를 찾아서 내일 출발하는 하롱베이 투어를 예약한 뒤 하노이를 돌아다녔다.
다시 찾은 호안끼엠 호수는 며칠 전과 전혀 다르다.
오늘은 일요일.
호안끼엠 주변은 차 없는 거리다.
호수 주변은 보행자들의 천국이 되고 진짜 차 대신 장난감 차가 도로를 점령한다.
공연을 위한 대형 무대가 설치되고 곳곳에 버스킹이 열린다.
베트남의 주말 풍경은 한국과 비슷하다.
한국과 베트남 사이, 미묘한 경계에 있는 기분이다.
하노이는 베트남의 정체성 그 자체인 수도지만 가장 빠르게 베트남을 벗어나고 있는 도시이기도 한가보다.
변화 그 자체인 이 도시에서 하노이의 휴일을 즐겨본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햇번은 머리를 잘랐다.
외형 변화는 가장 쉽고 확실하게 기분을 바꾸는 방법이다.
그래서 나는 네일숍을 찾았다.
오드리햇번이 공주 생활을 던지고 평민의 삶을 즐겼다면 나는 반대다.
평소에 어려운 사치와 향락의 길을 걷는다.
네일아트는 물론이고 한 번도 안 해본 패디큐어를 받을 생각이다.
찾아간 샵에 사람이 많아서 기다리는 중에 보니 한국인 손님이 꽤 많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손에는 산타와 루돌프, 발에는 눈송이를 그렸다.
큐빅까지 박았는데 가격은 손발 합해서 5만 원 수준이다.
한국에서 했다면 베트남까지 오는 비행기표 가격보다 비쌌을지도 모른다.
보석 박힌 손톱을 바라보니 쌀국수보다 특별한 음식이 먹고 싶다.
사실상 오늘이 베트남 여행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최후의 만찬을 즐겨본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는 프렌치 레스토랑이 제법 있다.
베트남 물가를 생각하면 비싸지만 서울이나 파리 물가를 생각하면 저렴하게 프랑스 요리를 즐길 수 있다.
특히 런치메뉴를 이용하면 5만원 이내에 프렌치 코스요리를 맛볼 수 있다.
베트남음식을 쌀국수 정도만 생각했던 사람에겐 낯선 선택이지만 해볼 만한 도전이다.
단, 길거리에서 반미를 먹어보고 현지인들 사이에서 쌀국수도 먹어 본 다음의 이야기다.
누군가 한국에 와서 김밥보다 스시를 먼저 찾는다면 좋은 선택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테니.
나는 접근성이 좋은 호안끼엠 옆의 레스토랑을 찾았다.
바로 옆이 베트남 최고의 번화가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차분한 분위기다.
두 가지 요리와 디저트가 나오는 코스를 선택했다.
정통 프랑스 요리라기보다는 베트남식 퓨전 프렌치다.
파리에서도 못 먹은 코스요리를 베트남에서 먹을 줄은 몰랐다.
요리는 모두 좋았다.
빼어난 미식가가 아니기에 고든 램지 같은 평가는 못한다.
다만 음식을 먹는 동안 받은 서비스, 분위기가 만족스럽다.
여행의 끝무렵에 예쁜 접시들을 늘어놓고, 그릇 너머로 하노이를 바라볼 수 있어서 행복하다.
배부르게 먹고 호안끼엠의 차 없는 거리를 즐기고 싶었지만 비가 온다.
결국 시내버스를 타고 롯데타워로 갔다.
보통 기념품 쇼핑 때문에 롯데마트에 많이 가는데 나는 쇼핑에 생각이 없어서 방문 예정이 없던 곳이다.
하지만 비 오는 하노이에서 할 일이 많지는 않다.
하노이의 시내버스 요금은 저렴하고 상태도 좋다.
하노이 버스투어라고 생각하며 롯데타워에 도착했다.
전망대를 올라가 볼까 했지만 너무 비싼 가격에 혀만 내둘렀다.
바로 앞까지 왔던 많은 외국인들이 가격을 보고 돌아선다.
나도 남은 돈은 전망대 입장료 대신 롯데마트 쇼핑비용으로 써야겠다.
롯데마트는 이름 때문인지 현지인보다 한국인이 많다.
여기저기 기념품을 챙기는 손길이 분주하다.
나는 아직 갈길이 남아서 베트남 로컬 와인과 간식 정도만 샀다.
식품코너의 떡볶이가 자꾸 날 바라봤지만 참았다.
다시 하노이 시내로 돌아오니 비가 멈췄다.
다시 밤이 다가오는 하노이를 마구 걸어 다니다 성당 앞에서 미사도 구경했다.
오늘은 일요일.
하노이에 모인 천주교인들이 성당 밖까지 모였다.
베트남 특유의 억양 때문에 미사 기도가 불경처럼 들리기도 한다.
성당에서 조금 더 걸어가니 일요일의 호안끼엠이 보인다.
옆 도로는 장난감자동차 경주장, 주변 쇼핑몰은 웨딩촬영 장소, 위쪽은 야시장, 그 너머는 맥주거리다.
호안끼엠의 밤은 낮보다 화려하다.
사실 좀 얼떨떨하다.
베트남에서 느낄 것이라 예상한 분위기는 아니다.
하노이의 밤이 이렇게 운치 있을 줄이야!
내일 아침의 하노이는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하며 처음이자 마지막 하노이의 일요일을 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