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롱베이 크루즈의 낮과 밤
하롱베이에 도착한 순간부터 가장 간절하게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날이 맑았으면...'. 12월의 하롱은 춥고 흐렸다.
12월 베트남 날씨는 기쁠 틈을 안 준다.
TV에서 보던 파란 하늘 밑 수백 개의 섬을 보고 싶었지만 택도 없는 꿈이었다.
슬쩍슬쩍 비가 뿌리는 섬 사이엔 한기만 돌았다.
하지만 실망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하롱의 풍경이 멋진 탓이다.
선착장에서 작은 배를 타고 크루즈선으로 옮겨 타는 동안 멀리 보이는 장면이 기대감을 준다.
입구에서는 섬보다 배가 더 많이 보이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섬과 또 하나의 섬, 크루즈선들이 모여 하롱이 된다.
크루즈선에 탑승하고 웰컴 티까지 마시고 방 배정을 받으니 드디어 시작되었다는 기분이다.
오래된 객실에는 습한 냄새가 조금 올라왔지만 지금까지 머물던 호스텔과 전혀 다른 하얀 침대 시트를 보니 기분이 좋다.
이렇게 1박 2일을 시작했다.
베트남이 한국같이 느껴지는 첫 번째 이유가 스산한 날씨라면, 두 번째 이유는 크루즈선의 인구구성이다.
하노이는 다낭에 비하면 한국인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배의 승객이 모두 한국인이다.
12명뿐이긴 하지만 배 한 척을 채울 정도로 한국인이 많은가 보다.
그렇게 낯선 항해에 대한 꿈은 기묘한 익숙함 때문에 깨졌다.
여긴 하롱인데 한강에서 유람선을 타는 기분으로 항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정겨운 것이 있다.
크루즈에서 다음 일정이 시작되는 시간마다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종을 친다.
학교에서나 듣던 땡땡땡 종소리를 여기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학교에서도 녹음된 종소리만 들었는데 여기서는 진짜 종을 친다.
기묘하게도 고국의 향수가 느껴진다.
식사 후 첫 일정은 승솟동굴이다.
멋진 동굴이지만 퐁냐에서 워낙 환상적인 동굴을 본터라 감동은 좀 덜하다.
고요함 속에서 동굴의 참모습을 즐길 수 있었던 퐁냐에 비해 하롱의 동굴은 관광객이 많아서 시끄럽다.
게다가 가이드가 큰 몫을 했다.
배의 승객 중 절반은 영어를 전혀 못하는 어르신들이었다.
처음엔 영어로 설명을 하던 가이드가 잘 들어주지 않는다고 느꼈는지 설명을 그쳤다.
다른 팀들은 가이드의 열정적인 설명을 들으며 동굴 곳곳을 돌아보고 있는데 우리만 아무 설명 없이 동굴을 한바퀴 돌아보고 나왔을 뿐이다.
가이드는 오직 어르신들도 아는 단어로 설명하려고 이쪽 바위를 보고 몽키!, 저쪽 바위를 보고 엘리펀트! 등등 동물 이름을 외울 뿐이었다.
시간도 절반만 걸리고 감동도 절반이다.
그 뒤로도 가이드는 1박 2일 동안 아무 설명 없이 길안내만 했다.
이동하는 동안 담배만 뻑뻑 피워대는 가이드의 태도는 크루즈의 재미를 반 이하로 떨어뜨렸다.
동굴에 이어 보트와 카약을 타는 시간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배를 저어야 하는 카약을 탈것인가, 다른 사람이 노를 저어주는 보트를 탈것인가를 선택하라고 말한 뒤 가이드가 해준 유일한 말은 노를 저어주는 사람들에게 팁을 주란 말이었다.
그렇게 여행은 본격적으로 한국인끼리 살아남기가 되었다.
내 기분은 경치를 보고 좋아졌다 가이드를 보고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기분이 수십 번 변한 하루의 끝.
저녁을 먹고 갑판에 나오니 깜깜하다.
하롱에 당일로 온다면 절대 알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물 위에 정차한 배 주변이 첩첩섬중이다.
주변에 건물 하나 없으니 빛은 오직 배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전부다.
이 세상의 본래 모습은 이토록 어둡고 막막한 것이었나 싶어 원초적인 공포감이 든다.
또 그만큼 아름답기도 하다.
물 위에서 까만 하늘과, 어두운 바람과, 날카로운 별을 보고 있으니 낮에는 크고 작은 배들 때문에 몰랐던 하롱의 진가가 드러난다.
아침이 되니 어김없이 종소리가 들린다.
이르지만 푸짐한 식사 후 티톱 전망대로 향한다.
원래는 이곳에서 여유롭게 수영을 즐겨도 되지만 추운 날씨 때문에 우리 일행은 물론 그 누구도 수영은 하지 않는다.
비까지 와서 우비를 입고 등산하듯 전망대에 올라야 했다.
전망대에서 바라 본 경치가 아름다운 만큼 따라오지 못하는 날씨가 안타깝다.
구름 낀 하롱은 신비한 느낌이 더해져 운치 있는 것도 맞지만 역시 맑은 날의 하롱도 궁금하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못 먹는 감 찌르듯 바다에 발만 담그고 배로 돌아와 짐을 챙긴다.
직원들이 다음 손님을 준비해야 한다며 체크아웃을 조른다.
여유롭던 마음이 갑자기 다급해진다.
그렇게 하롱과 작별할 시간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