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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Aug 29. 2018

카메라가 없는 여행자

사진 없이 여행을 남기는 방법

사진을 싫어한다.

정확히는 내 사진이 찍히는 것이 싫다.

당연히 셀카는 즐기지 않고, 대학 때는 졸업앨범도 만들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곳에 내가 남겨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꺼림칙하다.

내 사진이나 일기장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물건들이 사후에 돌아다니면 싫을 것 같다.

이순신, 안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일기장이 책이 되어 널리 읽히고 있는 실정이 마음에 내키는지 묻고 싶다. 

혹시 천년쯤 후에 내 사진이 발굴되고 1000년 전 인류의 얼굴 샘플로 사용되지는 않을까 하는 덧없는 상상을 하면 찝찝함을 감출 수 없다.


이탈리아 여행 중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휴대폰을 잃어버리고, 카메라는 원래 없다.

사실 벌어졌다고 할 일도 아니었다.

평소에 사진을 거의 찍지 않기 때문에 큰 문제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날 로마 시티투어를 함께 한 모르는 사람들은 가이드가 한번씩 주는 포토타임에서 다들 사진을 찍지 못하는 나를 걱정했다.

아무도 원래 사진을 안 찍는다는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혹은 사진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한 것 같다.)

반나절 쯤 지나니 솔직히 짜증이 났다.

“사진 못 찍어서 어떡해?”

“사진 못 찍는데 괜찮아요?”

“사진 찍어야 할 텐데...”

찍기 싫다는 사진을 강요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나를 많이 불편하게 한 여행자가 있었다.

나와 그녀 모두 혼자 왔기에 자연스럽게 짝이 되었다.

장기 여행 중에 DSLR을 가지고 다니는 그분은 딱 봐도 사진을 소중히 여기는 분이었다.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말을 온종일 거절했으나 결국 나를 사진촬영의 궁지에 몰아세웠다.

대체 오늘 하루만 만나는 우리 사이에 내 사진을 본인의 카메라에 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이라면 화를 내겠지만 20대 초반의 나는 30대 어른을 거절하는 방법을 몰랐다.

결국 그분은 내 사진을 본인의 카메라에 담았다.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그럼 나중에 보내 달라고 메일주소를 알려줬지만 예상대로 아무 메일도 오지 않았다.

내게 사진을 주지 않는 건 상관없지만 그분이 내 사진을 꼭 지워주셨기를 바란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카메라에 내가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소름이 돋는다.


그렇게 사진을 싫어하는 나지만 사진을 전혀 안 찍는 건 아니다.

내 얼굴을 찍는 건 싫어하지만 풍경사진은 좋다.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는 셀카 한두 장 정도 남기고 싶을 때도 있다.

많이는 아니고 정말 기록에 필요한 수준까지다.

여행에 방해되지 않는 정도의 가벼운 카메라가 있으면 내 기억력이 보완될 것 같다.

‘내가 이 장소에 왔었다, 이걸 먹었다. 내가 맛있게 먹은 그 요리 위에는 토핑으로 뭐가 들어갔었다.’

라고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사진까지는 찍고 싶다.

기동성을 떨어뜨리는 카메라의 무게와 눈으로 보는 것을 방해하는 무차별적인 사진 찍기가 싫을 뿐이다.

내게 사진이란 글을 쓰기 위한 자료고 밑 작업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대신 작가는 여행지에서 돌아오고 나서부터가 힘이 든다. 사진은 현상을 하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작가는 그때부터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책상 앞에 앉아서 메모한 단어에 의지해 머릿속에 여러 가지 현장을 재현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보다 수준이 높으신 분이다.

카메라 없이 여행을 복기하고 글을 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울지, 그리고 재미있을지 상상이 안 된다.

내 기억력으로 거기까지는 무리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사진만으로 글을 쓰고 싶다.


기억을 그대로 가져오는 건 사진 한 장으로 할 수 있다. 

하지만 여행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내 기억을 내가 비틀고, 주무르고, 오려야 한다.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이면의 무언가를 만들어 채우는 것.

스도쿠 퍼즐을 풀 듯 힘들게 보이지 않는 숫자를 알아내서 맞추는 기분이다.

나는 사진 없이도 잘 남기고 싶다.

사진을 배웠다면 카메라를 만져 나를 남길 수 있겠지만 나는 카메라보다는 글을 많이 배웠고 익숙하다.

대단치 못한 글솜씨지만 그래도 가장 유연하게 다루는 수단이 글이기 때문에 나는 사진이 아닌 글을 남긴다.

나를 나로 남기기엔 사진보다 글이 더 좋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남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남기고 싶다.

그래서 인물사진이 아닌 풍경사진을 찍는다.

말하자면 풍경사진에 글을 함께 남기는 것이 내 방식의 셀카다.

사진도 좋지만 그날 그 여행에서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눈이 아닌 머리로 본 것이 무엇인지를 남기는 것도 나를 남기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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