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없이 여행을 남기는 방법
사진을 싫어한다.
정확히는 내 사진이 찍히는 것이 싫다.
당연히 셀카는 즐기지 않고, 대학 때는 졸업앨범도 만들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곳에 내가 남겨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꺼림칙하다.
내 사진이나 일기장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물건들이 사후에 돌아다니면 싫을 것 같다.
이순신, 안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일기장이 책이 되어 널리 읽히고 있는 실정이 마음에 내키는지 묻고 싶다.
혹시 천년쯤 후에 내 사진이 발굴되고 1000년 전 인류의 얼굴 샘플로 사용되지는 않을까 하는 덧없는 상상을 하면 찝찝함을 감출 수 없다.
이탈리아 여행 중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휴대폰을 잃어버리고, 카메라는 원래 없다.
사실 벌어졌다고 할 일도 아니었다.
평소에 사진을 거의 찍지 않기 때문에 큰 문제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날 로마 시티투어를 함께 한 모르는 사람들은 가이드가 한번씩 주는 포토타임에서 다들 사진을 찍지 못하는 나를 걱정했다.
아무도 원래 사진을 안 찍는다는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혹은 사진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한 것 같다.)
반나절 쯤 지나니 솔직히 짜증이 났다.
“사진 못 찍어서 어떡해?”
“사진 못 찍는데 괜찮아요?”
“사진 찍어야 할 텐데...”
찍기 싫다는 사진을 강요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나를 많이 불편하게 한 여행자가 있었다.
나와 그녀 모두 혼자 왔기에 자연스럽게 짝이 되었다.
장기 여행 중에 DSLR을 가지고 다니는 그분은 딱 봐도 사진을 소중히 여기는 분이었다.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말을 온종일 거절했으나 결국 나를 사진촬영의 궁지에 몰아세웠다.
대체 오늘 하루만 만나는 우리 사이에 내 사진을 본인의 카메라에 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이라면 화를 내겠지만 20대 초반의 나는 30대 어른을 거절하는 방법을 몰랐다.
결국 그분은 내 사진을 본인의 카메라에 담았다.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그럼 나중에 보내 달라고 메일주소를 알려줬지만 예상대로 아무 메일도 오지 않았다.
내게 사진을 주지 않는 건 상관없지만 그분이 내 사진을 꼭 지워주셨기를 바란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카메라에 내가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소름이 돋는다.
그렇게 사진을 싫어하는 나지만 사진을 전혀 안 찍는 건 아니다.
내 얼굴을 찍는 건 싫어하지만 풍경사진은 좋다.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는 셀카 한두 장 정도 남기고 싶을 때도 있다.
많이는 아니고 정말 기록에 필요한 수준까지다.
여행에 방해되지 않는 정도의 가벼운 카메라가 있으면 내 기억력이 보완될 것 같다.
‘내가 이 장소에 왔었다, 이걸 먹었다. 내가 맛있게 먹은 그 요리 위에는 토핑으로 뭐가 들어갔었다.’
라고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사진까지는 찍고 싶다.
기동성을 떨어뜨리는 카메라의 무게와 눈으로 보는 것을 방해하는 무차별적인 사진 찍기가 싫을 뿐이다.
내게 사진이란 글을 쓰기 위한 자료고 밑 작업이다.
나보다 수준이 높으신 분이다.
카메라 없이 여행을 복기하고 글을 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울지, 그리고 재미있을지 상상이 안 된다.
내 기억력으로 거기까지는 무리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사진만으로 글을 쓰고 싶다.
기억을 그대로 가져오는 건 사진 한 장으로 할 수 있다.
하지만 여행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내 기억을 내가 비틀고, 주무르고, 오려야 한다.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이면의 무언가를 만들어 채우는 것.
스도쿠 퍼즐을 풀 듯 힘들게 보이지 않는 숫자를 알아내서 맞추는 기분이다.
나는 사진 없이도 잘 남기고 싶다.
사진을 배웠다면 카메라를 만져 나를 남길 수 있겠지만 나는 카메라보다는 글을 많이 배웠고 익숙하다.
대단치 못한 글솜씨지만 그래도 가장 유연하게 다루는 수단이 글이기 때문에 나는 사진이 아닌 글을 남긴다.
나를 나로 남기기엔 사진보다 글이 더 좋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남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남기고 싶다.
그래서 인물사진이 아닌 풍경사진을 찍는다.
말하자면 풍경사진에 글을 함께 남기는 것이 내 방식의 셀카다.
사진도 좋지만 그날 그 여행에서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눈이 아닌 머리로 본 것이 무엇인지를 남기는 것도 나를 남기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