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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Oct 21. 2018

생의 첫 여름 휴가

휴가와 여행 사이, 그 어디쯤이었던 4박 5일

프리랜서는 비싸고, 사람 많고, 더운 날을 골라 떠나는 것을 휴가라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일이 내게 일어나벌였다?


대만에 갔다.

첫 휴가였다.

프리랜서였던 내게 여행은 있어도 휴가는 없었다.

학생 때는 방학이나 휴학 중에, 프리랜서 때는 하던 일이 끝나고 다음 일로 들어가기 전 (기약을 알 수 없는 다음 출근까지) 남아도는 시간에 여행을 갔다.

물론 이 말은 일이 연이어 있으면 휴가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다 잠시 직장이 생겼고, 고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정해진 시간에 맞춰 일어나는 삶을 살고 있다.

9to 6 삶에는 한 가지가 더 따라왔다.

바로 ‘여름휴가’.

프리랜서는 비싸고 사람 많고 더운 날을 골라 떠나는 것을 휴가라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일이 내게 일어난 것이다.

직장인의 여름휴가라는 것이 처음 겪는 일인지라 휴가 과정이 재밌었다.

여름휴가라는 개념 자체가 그랬고, 팀원끼리 겹치지 않는 날로 일정을 조정하고 휴가 날짜를 보고하는 과정들이 나로선 남몰래 놀랄 일이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놀라고 즐거워하다 뭔가 허전했고 아차 싶었다.

아.

나만 휴가 계획이 없네?

여차저차 휴가를 잡고 떠나기 전 머무른 인청공항 호텔 다락휴

내가 휴가를 가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남들은 매년 자연스럽게 잡았을 그 계획이 내게는 없었다.

놀 생각을 잊은 스스로에게 마음의 상처를 받고 급하게 휴가 계획을 잡았다.

휴가 계획이란 꽤 어려웠다.

우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평소 지론이 '비행기표 아까우니까 열흘은 가야지!'였던 벼락치기 여행자인 나에게, 주말을 끼워 최대 5일만 가능한 여행은 마치 미션 같았다.

일단 목적지는 5일 안에 다녀오기 제일 만만한 곳 중 하나인 대만으로 정하고 호다닥 비행기표를 샀다.

가고 싶은 곳이 너무나 많은데 오직 거리 때문에 대만이 다음 목적지가 되었다.

대만행 비행기표 가격이 작년 베트남 비행기표 가격과 맞먹는 것을 보며 비수기였다면 10만원은 싸게 갔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입이 튀어나왔다.

계획을 늦게 세운 탓에 휴가 날짜는 9월 초로 넘어갔다.

더운 날 더운 나라에는 가지 않겠다는 다짐이 깨졌다.

너무 늦게 잡은 계획 덕에 남들이 휴가를 갔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는 것을 보며 부러움의 현기증을 느끼다 보니 어느새 나에게도 생의 첫 여름휴가라는 것이 오긴 왔다.     

휴가를 위해 최대한 효율적인 이동시간을 선택해야 했다.

지방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는 막차는 이르고 첫차는 늦다.

아침 9시 1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선 막차를 타고 공항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 제일 현명하다.

정시퇴근이라 쓰고 칼퇴라 부르는 그것을 마친 뒤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여행수지 적자의 2등 공신 인천공항에 가까워지자 나를 반기는 것은 폭우였다(아마 여행수지 적자의 1등 공신은 나일 것 같다).

올여름 태풍이 지나가 직후의 그날이었다.

일기예보에서는 다른 곳은 비가 그치겠지만 인천 일대에는 폭우가 계속된다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우주정거장 컨셉으로 만들었다는 인천공항.

사방이 유리로 덮인 인천공항.

그곳의 밤엔 천둥번개가 참 잘 보였다.          

천둥번개와 빗소리를 들으면 눈을 붙이고 새벽을 맞았다.

수속을 마치고 라운지에서 커피와 맥주 사이에서 갈등하다 커피를 집어 들었다.

여행 중에는 시간에 관계없이 취해야 맛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지만 휴가 중에는 깨어있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타이페이에 도착했다.

첫날은 딘타이펑에서 밥을 먹고 비가 좀 덜 내려서 지하철 타기 전에 다안공원에서 잠시 산책한 것이 일정의 전부다

타이페이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퇴근 후 바로 출발한 일정 탓에 몸이 피곤한 몸에 노곤함이 더해졌다.

결국 호텔에 몸을 깔고 밍기적밍기적이라는 효과음을 온몸으로 만들며 혼자 음악을 듣고 누웠다.

하려던 일정 따위 모두 무시하고 외출은 식당이 전부였다.

첫날을 그렇게 보내고 이후 이틀은 여행사에서 진행하는 투어에 다녀왔더니 타이페이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결국 4박 5일 일정 중 4일째가 매우 바빠졌다.

한국에 왜그렇게 패키지여행이 발달했는지 알겠다.

2박 3일, 3박 4일 휴가 한번 내기도 힘든 직장인들이 1초까지 아껴 여행하고 싶은 마음은 너무 당연하다.

비를 보며 눈을 반만 뜨고 있던 첫날의 여유는 사라졌다.

예쁜 카페를 돌며 일기나 쓰고 싶다던 휴가 계획은 와장창 무너졌다.

결국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여행 중 9시 전에 기상, 1시간도 안 되는 애매한 티타임 등등.

여행은 여유에서 오는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겐 수치스러운 일들이다.

짧은 여행 중에는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서두른 여행이 서투른 여행이 돼버렸다.

대만에서 꼭 가보고 싶었던 화산1914였는데 마지막 날에 간신히 방문했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여행 마지막에 벌어져 벌였다.

비행기가 지연된 것이다.

지연이 처음 겪는 일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에게는 일터가 있다.

출근이 반나절 앞이었다.

잠깐 지연이라던 비행기는 반복해서 지연 소식을 전했다.

지연은 30분에서 30분이 또 늘었고, 거기에 20분이 또 늘고, 다시 한 시간이 더해졌다.

항공사에서 사과의 뜻으로 내민 밀바우처를 받는 순간 난 하고야 말았다.

심한 욕.

오늘 안에 집에 가기 틀렸구나.

항공사가 자발적으로 밀바우처를 꺼냈다면 그 지연이 한두 시간짜리 일리는 없다.

항공사가 제공한 밀바우처는 150 대만달러.

대만 공항의 물가로 맥주 한 병이 160달러였다.

남은 대만 돈을 다시 달러로 환전한 상태라 나에겐 10원도 없었다.

대만 거지인 나는 몸도 마음도 탈탈 털린 기분이었다.

항공사에서 준 바우처에 돈을 보태 쓰려면 대만 화폐가 필요했지만 나에겐 1원 반푼 어치도 없었다.

결국 온 공항을 헤매서 150달러짜리 샌드위치를 하나 찾았다.

같은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는지 줄을 서있었고 우리는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하지 못하는 샌드위치 가게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공항에서 제일 저렴한 한 끼를 들고 내가 하는 걱정은 딱 하나였다.

출근.

내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던 그날의 비행기 출도착 시간

인천으로 가는 다른 비행기들이 지연 없이 가고, 또 그 비행기들이 한국에 도착할 시간이 되었다.

결국 지연은 4시간을 넘겼다.

타이페이 인천 비행시간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었다.

무엇보다 나의 초조함은 출근에서 나왔다.

출근은 참 사람을 미치게 하는 구석이 있다.

결국 4시간 넘게 지연된 비행기를 타고 4시간도 못 자고 출근한 뒤 일상을 보냈다.          

돌아보니 나는 휴가를 업무의 연장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출근 중 다녀오는 여행에 익숙하지 못했다.

도저히 느긋할 수 없었다.

5일은 놀기에 너무 짧다.

계획적인 여행을 기피하는 나에게 여름휴가는 힘든 일이었다.

휴가를 한 달씩 보내는 유럽인들이 한국인을 보면 얼마나 이상할지 예상이 된다.

휴가가 아닌 여행을 떠나고 싶은 대한민국 직장인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ps. 여담인데 출근 못할 뻔한 상황이 자꾸 생각나서 항공사에 보상이 가능한지 물었더니 답변이 왔다(4시간 이상의 지연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기체 점검 때문에 벌어진 지연은 항공사 측에 책임이 없고 법적으로 보상할 의무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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