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여행 첫날
시드니에 도착하던 날, 호텔에 짐을 던지고 처음 한 일은 하이드파크에 드러눕기였다.
일명 거지새들은 비둘기 정도는 귀엽게 만들 정도로 무서웠고, 엄마가 줄지어 가는 벌레를 싫어해서 오래 누워 있지는 못했다.
하지만 호주로 이민 가는 이유를 알아내는 데는 그 잠깐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시드니는 활기는 있지만 요란하지 않고, 복잡하지만 시끄럽지 않고, 고요하지만 조용하지 않은, 그런 표현하기 힘든 느낌이었다.
런던의 하이드파크와 이름 빼고 닮은 점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누워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똑같았다.
다들 대낮에 살을 내놓고 낮잠 자는 일이 그들의 일이라는듯 시간을 보냈다.
그 공원에서 유일하게 게으른 존재는 더 강하게 빛나지 못하는 햇빛이었다.
시드니의 첫 일정, ‘하이드파크에 드러눕기’ 덕분에 이 도시에서 여유가 얼마나 일상이고 당연한 일인지를 알았다.
시드니 특유의 여유는 도시 전체에 만연해서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퀸빅토리아빌딩에서 호텔 체크인 시간까지 버티기 위해 게으른 차를 마실 때도 쇼핑몰답지 못한 평온을 느꼈다.
오래된 느낌이 팍팍 나는 인테리어 속에 울려 퍼지는 정각을 알리는 시계소리, 쇼핑몰 한가운데서 에프터눈티세트를 즐기는 사람들.
시드니 천문대 앞에 앉았을 때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심지어 하버브리지 위를 걸을 때도 자동차 소음 사이였지만 소란스럽지 않았다.
어쩌면 열시간의 비행에 취한 몸이 스스로 건 최면이었을지 모르고 호주에 대한 오랜 동경이 보여준 환상 탓일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시드니에 있는 동안 그 느낌은 깨지지 않았다.
호주를 특별하게 느낀 가장 큰 이유는 날씨 때문 같다.
호주는 내가 겪어 본 날씨 중 가장 쾌적한 날씨를 가진 나라다.
남반구인 호주는 내가 여행했던 1월에 한여름이었다.
여름이고, 호주의 자외선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에 패딩을 벗어던지고 반팔만 챙겨 가볍게 떠났지만 뜻밖에 긴팔이 필요한 순간이 찾아왔다.
유럽의 여름을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근교로 나가면 그늘이 없어서 햇볕이 따가웠지만 도시 안에서는 건물 사이로 드리운 그림자와 바람이 있어서 항상 시원했다.
지형적으로 대륙 안에는 사막, 바다 건너에는 남극이 있어서 어디서 바람이 부는지에 따라 온도가 시간마다 달라지기도 한다.
쨍한 빛이 온 나라를 다 말려서 습도도 낮으니 한여름 주제에 쾌적함이 느껴질 정도다.
호주의 날씨는 사람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다.
캥거루부터 펭귄까지 다양한 동물, 쥐라기 공원을 떠올리게 만드는 특이한 식물이 살기 좋은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열두달 내내 온도 차가 적어서 자동차도 수명이 길다고 한다.
기계도 장수할 정도니 사람과 동식물에겐 얼마나 천국일까?
사막 위의 도시, 북극의 삶도 있는데 이런 기후에서 사는 건 거의 거저 사는 것 아닌가 싶은 정도다.
시드니의 분위기가 맘에 드는 것과는 별개로 시드니에 별다른 볼거리가 없는 건 인정해야 한다.
시드니가 얼마나 유명한 도시인데 그게 무슨 말인가 싶을 수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시드니에는 시간을 오래 들여 볼 만한 관광지가 드물다.
랜드마크 몇 개를 빼면 딱히 발길 닿는 곳이 없다.
건물의 크기와 아름다움을 비교하는 게 아니다.
외관은 다른 유명 도시와 별 차이 없겠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역사다.
시드니에서 역사가 담긴 건물이라고 해봐야 캡틴쿡의 오두막 정도다.
역사가 짧은 만큼 초기 건축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지만 이민자라는 한계 때문에 태초의 건물도 역사가 짧다.
물론 건물의 가치가 시간으로만 만들어지는 건 아니고 시드니에도 엄청난 랜드마크가 몇 개 있다.
그 첫 번째는 당연히 오페라하우스다.
유럽대륙 전체보다 큰 호주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건물은 역시 오페라하우스다.
시드니에 간다면 누구나 이 앞을 기웃거린다.
공연을 안 봐도 입장료를 내고 내부 투어를 하는 건물이지만 난 건축물에는 큰 관심이 없다.
오페라하우스를 본 소감을 솔직히 말하면 현실감이 떨어졌다.
너무 유명한 존재를 앞에 둔 탓인지 별로 실감이 안난다.
건너편에서 볼 때 보다 가까이 갈수록 자세하게 보였고 이게 정말 내가 아는 오페라하우스가 맞는지 의심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멀리까지 왔으니 오페라하우스를 보긴 해야 하는데 별 관심은 없으니 내가 택한 방법은 공연이었다.
자세히 볼수록 실망스러워서 역시 공연을 예약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오페라 하우스이니 당연히 오페라를 보고 싶었지만 우리 가족이 영어공연을 얼마나 흥미로워할지는 미지수였기에 그냥 만국공통어인 음악공연을 예약했다.
재즈공연이었고 메인홀이 아닌 오페라하우스의 건축가 우촌의 이름을 딴 작은 공연장에서 열렸다.
우촌룸은 정보도 별로 없는 구석의 작은 공연장이었다.
하지만 건축가의 이름이 붙은 공연장이라는 상징성이 있고, 무엇보다 무대 반대편으로 바다가 보인다는 특별함이 있었다.
항구에 자리한 공연장에서 바다가 보이는 방보다 매력적인 방이 있을까?
솔직히 공연은 조금 지루했지만 샴페인 한잔과 함께 바다를 등지고 듣는 무대를 본 기억은 아직도 좋다.
랜드마크 몇개 이외는 시드니는 다른 도시와 구분되는 특별한 관광지가 생각보다 적어서 어딜 가야할지가 고민이었다.
그래서 관광지가 별로 없다면 차라리 그곳 사람들이 평소에 할만할 일을 하기로 했다.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을 보고, 아이스버그에서 수영을 했다.
브런치를 먹고 공원을 가로질러 시드니타워아이 뷔페에 가고 본다이비치 앞 공원에 앉아 바람을 맞는 일 모두 즐거웠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전부 관광객티를 내는 행동이었지만 착각이라도 덜 바쁜 관광객이 되어 그 도시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가져보는 건 꽤 괜찮은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