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 보러 왔습니다
호주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도가 되었어도 이상할 것 없는 도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상위 랭킹.
멜버른은 칭찬을 많이 받는 도시지만 그 수식어가 여행지 멜버른에도 해당하는지는 의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비행기까지 타고 꾸역꾸역 찾아온 속내는 따로 있다.
나는 야생의 펭귄이 보고 싶었다.
펭귄은 대단히 귀엽다.
나의 매우 주관적인 시선에서 펭귄이란 귀엽기 위해 태어난 생명체다.
대부분의 동물을 좋아하지만 펭귄은 유난히 시선이 간다.
판다 같은 멸종 해 마땅할 만큼 게으르지만 귀여워서 살아 남아 중국의 마스코트가 된 운 좋은 생물에 비해, 남극의 추위 속에서 고단하게 살면서도 목숨과 귀여움을 지키는 펭귄의 귀여움은 진짜다.
펭귄이 꼭 남극에만 사는 생물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조금 배신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사랑스러움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런 펭귄이 멜번 근교에 산다.
펭귄이 남극에만 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나는 멜번에 가야 했다.
멜번에서 조금 떨어진 필립아일랜드에는 펭귄이 바다에서 돌아오는 일몰시간에 맞춰 펭귄퍼레이드가 열린다.
시간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보통 오전에는 단데농 지역을 방문하고 오후에 필립아일랜드로 간다.
100년이 넘은 증기기관차를 타고 단데농지역을 둘러보고 사사프러스 마을을 방문하는 일정이다.
물론 단데농투어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필립아일랜드를 기대한 나한테는 그냥 시간 떼우기 같은 일정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너무 기대를 안 했던 탓에 기대 이상으로 좋은 시간을 보냈다.
멜번을 떠나 도착한 단데농은 생각보다 울창한 숲이었다.
잠깐 지나는 구간만 숲일 거라 생각했는데 기차가 달리는 모든 구역에 나무가 우거져있었다.
하얀 연기를 흩날리는 기차, 반바지 입은 캐릭터 같은 역무원, 기분 좋게 시원하고 상쾌한 숲의 공기까지 무엇하나 기분을 방해하는 것이 없었다.
퍼핑빌리 기차를 타고 달리는 시간은 호주 여행 중 가장 티 없이 맑은 순간이었다.
호주는 확실히 미식을 위한 여행지는 아니다.
기대가 없었음에도 역시 맛으로 기억에 남은 음식은 없다.
다만 다른 이유로 기억에 남은 음식들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사사프러스 동화마을에서 먹은 스콘이다.
사사프러스 마을은 투어 일정 중에 잠시 들리는 마을이라 보통은 잠깐 산책 정도만 가능한 시간이 배정되는데 내가 택한 여행사는 일정이 넉넉한 편이라 이곳에서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가이드는 현지인들이 이 동네를 찾아오는 이유는 사실 스콘 때문이라며 유명한 맛집을 알려줬다.
원래는 두 시간씩 줄을 서야 한다는데 우리가 도착한 시간엔 참 우연하게도 대기시간이 적어서 운 좋게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식탁 위에 올라온 스콘 맛집 미스마플스티룸은 동화마을에 어울리는 난쟁이들이 하품을 하며 곡괭이 하나씩 들고 나올 것 같은 가게였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이좋은 테이블엔 주인의 취향이 드러나는 꽃무늬 식탁보가 깔려있었다.
호주에서 맛집 찾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인테리어만으로도 만족했다.
스콘과 뜨거운 차,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보는 순간 행복했다.
증기기관차를 타고 높은 숲을 지나 동화 속 오두막에서 호주 아주머니의 비법이 담긴 폭신한 스콘 한 조각을 먹을 수 있다니!
역시 뜻밖에, 사소한 순간에 느껴지는 보람 때문에 여행을 멈출 수 없다.
펭귄을 보러 가는 길은 차가 거의 없는 들판이었는데 종종 도로 위에 차와 사람 대신 야생동물이 뛰어다녔다.
이름 모를 동물들과 캥거루가 차 옆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차도 바로 옆 풀숲에서 고개를 들고 제 할 일 하는 캥거루와 이름 모를 새들은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캥거루 로드킬이 왜 일어나는지 알겠다.
호주탐험 신비의 세계를 달려 펭귄퍼레이드가 열리는 센터로 들어갔다.
낮동안 바다에 나갔던 펭귄들이 해가 지면 집을 찾아 들어오는데 집을 찾아 무리 지어 오는 모습을 펭귄퍼레이드라고 부른다.
여기가 펭귄 잘한다는 소문이 많이 났는지 주차장에 빈틈이 없다.
계절 특성상 어두워지는 시간이 9시에 가깝기 때문에 펭귄은 늦게 들어온다.
펭귄이 다니는 바닷가 근처에 좌석이 있어서 시간에 맞춰 앉아 퍼레이드를 봐야 한다.
자연보호에 민감한 호주기 때문에 펭귄에게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갈 수 없고 펭귄의 시력을 상하게 하는 플래시 때문에 사진 촬영 자체가 금지된다.
펭귄에 대한 설명을 읽고 기념품점을 기웃거리다 밖에 나가니 이미 명당자리는 다 나갔다.
사실 진짜 명당자리 펭귄플러스좌석은 추가 요금을 내고 들어간다는데 너무 늦게 알아버린 탓에 티켓을 구하지 못했다.
너무 아쉬웠지만 적당히 자리를 잡고 일반 좌석에 앉았다.
시간이 지났지만 역시 일반 좌석에서는 펭귄이 안보였다.
앞자리에서는 조금 보이는 것 같았지만 도저히 볼 수 없어서 일찍 포기하고 나무 데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퍼레이드는 아니지만 돌아오는 중인 펭귄들이 데크 아래로 지나갔다.
작은 몸으로 울면서 상봉하는 부모 자식들의 모습이 짠할 정도로 귀엽다.
야생의 펭귄이 나타났다!
동물원이 아닌 자연에서 발밑으로 펭귄이 지나가다니.
펭귄을 바라보다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만두라고 소리 지르다 보니(야생동물이 시력을 잃는 건 죽는다는 말과 똑같다) 날이 어두워졌다.
아쉽게도 돌아갈 시간이 되어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사람들이 앞으로 가지 못하고 멈춰있다.
알고 보니 건물 입구 쪽으로 펭귄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어서 길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의 통행을 막아뒀다.
작은 펭귄 한 마리가 집으로 무사히 지나가기 위해 수십 명의 인간들은 갈길을 멈춰야 했다.
근엄하게 걷던 녀석은 뭔가 이상하긴 했는지 두리번거리다 유유히 사라졌다.
펭귄이 길을 떠나고서야 직원들은 울타리를 걷고 사람들이 지나도록 허락했다.
이 귀엽고도 위대한 장면은 내가 호주를 기억하는 키워드다.
인간은 자연을 바라보고 동경할 수 있지만 끼어들지 않아야 한다.
감히 보호하려는 생각이 아니다.
자연은 그저 존재할 뿐이고 인간은 자연의 흐름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는다.
혹시 주차장으로 갔을지 모를 펭귄 한마리를 위해 센터를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차를 조심해서 모는 호주 사람들은 자연을 빌려 도시를 만들고 사는 최소한의 염치를 생각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숲에서 바다까지, 캥거루에서 펭귄까지 지켜보면서 호주라면 언젠가 인간이 자연에 폐를 끼치치 않고 사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