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번의 느낌
멜번 시내를 처음 봤을 때, 농도 짙은 시드니라고 생각했다.
시드니에서 느낀 평화롭지만 활기찬 분위기가 조금 더 압축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전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는 명성에 주눅 들어 억지로 떠오른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멜번을 지켜본 며칠 동안은 그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좋다는 생각과 멜번의 관광지로서의 매력은 별개다.
시드니 관광지가 블루마운틴이듯 멜번의 대표 관광지는 그레이트오션로드다.
멜번시티 안에는 특별한 구경거리가 없다.
볼만한 수족관, 봐줄 만한 미술관, 괜찮은 공원들이 있지만 그건 다른 곳에도 흔히 있는 것들이다.
그나마도 대부분 오후 5시 전에 문을 닫는다.
자연스럽게 멜번에서는 늦잠을 자거나 장을 봐서 요리를 해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 평범한 일정 사이에서 이벤트처럼 전망대에 올라가서 호주오픈 경기를 하는 테니스코트를 바라보고, 남반구에서 제일 크다는 쇼핑몰에 가보고, 잠들기 전 야라강을 산책하는 것이 여행의 전부였다.
엄마는 불만이었겠지만 나는 그런 시간이 좋았다.
고작 하루 이틀뿐인 짧은 여행이었지만 멜번의 정취가 기억나는 건 그 덕분이다.
멜버른에서 가장 신나게 돌아다닌건 남반구에서 제일 크다는 체드 스톤 쇼핑몰 안에서였다.
시내는 유럽 어딘가에 있을법한 거리 같을 뿐 특별한 점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 가장 멜번다운 분위기를 느낀 장소는 '빅토리아주립도서관'이었다.
널찍한 공간에 방대한 역사 문화 지식이 가득하고, 책 읽는 사람과 관광객이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스쳐가는 사람도 가볍게 책 한 권 꺼내 들 수 있는 곳, 독서하는 사람들 옆에서 자연스럽게 체스말이 오가는 침묵을 강요하지 않는 곳, 무엇보다 건물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공간.
규칙이 있어서 자유로운 그곳은 멜번의 분위기를 담아 책을 꽃피우는 온실 같았다.
그런 나직한 분위기가 멜번이었다.
건물 외관 공사 중이었지만 부산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둥근 모양 덕에 개방적이고 모두 서로를 지켜보는 곳이지만 다들 은밀한 지식을 쌓는다.
나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지만 책이 있는 공간은 좋아한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는 독서 이상으로 많은 생각을 준다.
벽에 빼곡한 책을 바라보고 서있으니 여기서 책만 읽다가도 멜번에 온 가치는 충분히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한권 정도는 가져와서 여기서 느긋하게 읽는다면 그 책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렌터카를 받아 그레이트오션로드로 가기 전 멜번 마지막 일정은 브런치였다.
주방도 있으니 숙소에서 간단하게 해결하는 편이 더 좋았겠지만 마지막으로 멜번의 음식이 먹고 싶었다.
멜번에는 유명한 레스토랑 보단 유명한 카페가 넘친다.
그중에서 어디를 골라야할지가 고민이었다.
결국 선택한 곳은 호텔과 가까운 하이어그라운드였는데 사람이 많아서 정신없이 먹어야 했고 맛도 평범했다.
이때쯤엔 호주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는 이미 버렸기 때문에 맛은 상관없었다.
내가 기대한 건 그냥 멜버른다운 브런치일 뿐이었다.
브런치는 도시에 특화된 음식이다.
복잡하고 유명한 카페에서 보내는 여유로운 시간이 도시의 분위기 자체다.
가벼운 듯 묵직한 시럽을 뿌린 팬케이크와 카페인이 들어간 플랫화이트 한잔, 그러나 유기농 재료를 써서 건강하게 보일 것.
버려질 수 있었던 건물을 모두가 들어오는 공간으로 개조한 카페.
전 세계 어느 도시에나 있을법한 한 끼지만 멜번에서만 가능하다고 착각하게 될 마지막 식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