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길, 나도 달려보다
나는 운전을 잘 못한다.
장롱면허를 탈출한 지 1년도 안된다.
아직도 내 차에 남을 태우는 일은 꺼림칙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까지 와서 렌트를 했다.
그레이트 오션로드를 달리기 위해서다.
보통 그레이트오션로드는 투어를 이용해 당일로 다녀온다.
하지만 죽기 전에 꼭 한번은 가봐야 한다는 그 길을 하루 만에 다녀오기는 너무 아까웠다.
혼자도 아니고 세명이 함께 하는 길이니 하루에 하루를 더해 여유를 느껴야겠다 싶어 덜컥 차를 빌렸다.
짧은 운전 실력에 보다 짧은 영어 솜씨로 어려운 영어 가득한 보험 서류를 보는 것부터 땀을 흘려야 했지만 잘한 선택이었다.
트램이 다니는 시내를 다닐 용기는 없어서 그레이트오션로드를 마지막 일정으로 잡은 뒤 시내에서 허츠 렌터카 공항지점으로 이동해서 차를 빌리고, 마지막 날 반납 후 바로 비행기를 타는 일정을 잡았다.
성수기라 차가 부족했는지 내가 예약한 차종이 없어서 다른 차를 받아야 했다.
폭스바겐 골프를 받아서 운전석은 반대지만 독일차인 덕에 깜빡이 방향은 한국과 같았다.
덕분에 창문 대청소는 피했다.
호주의 도로는 생각보다 똑같고 생각보다 달랐다.
고속도로기 때문에 운전하는 감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폭이 조금 넓은 것 같았지만 어마어마하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초대형 트레일러들이 옆을 지나가는 장면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렇게 길과 속도에 익숙해졌을 때는 차도로 산책 나온 염소를 보고 웃을 수 있었다.
내 차보다 좋은 외제차를 타고 타국의 길을 달리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길이 익숙해지기를 넘어 지루해졌을 때쯤 드디어 그 유명한 그레이트 오션로드 입구, 메모리얼 아치가 보였다.
작고 낡은 그 간판 아래로 큰 여정을 떠나는 차들이 오갔다.
명성에 비해 다니는 차는 적고 특별함은 찾기 힘든 길이었다.
뭔가 더 있나 싶어 주차장 주변을 살펴봤다.
도로 옆에 나무 사이로 만들어진 좁은 길로 들어가니 바다가 아름다웠다.
오션로드 시작점의 오션.
그 평범한 바닷물이 특별한 파도를 만들고 있었다.
길은 산속으로, 바다로 이어졌고 마주오는 차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구불거렸다.
이런 길을 운전하지 않고 편하게 갈 방법이 있는데 굳이 렌트하는 이유라면 역시 내리고 싶은 데서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레이트오션로드는 곳곳에 이름 없는 전망대가 있어서 마음이 내킬 때 차를 세우고 바다를 바라보고 풀밭을 뛰어다니는 소들을 구경했다.
해는 길지만 운전이 미숙하고 여기저기서 내려 기웃거린 탓에 첫날은 숙소까지 가니 해가 꼴깍 넘어갔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사무실은 이미 문을 닫고 문 앞에 내 이름과 방번호를 써 두고 퇴근을 했다.
숙소가 있는 포트캠밸은 그레이트오션로드의 끄트머리쯤에 있는데, 도착 전까지 도저히 마을이 없을 것 같은 곳에 나타났다.
내비게이션이 5분 후 도착이라고 알려주는 지점에서도 불빛 하나 없는 길과 들판만 이어지다 갑자기 건물이 나타났다.
그곳은 그레이트오션로드를 오가는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 몇 개만 있는 단란한 마을이었다(나중에 헬기투어에서 내려다보니 마을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크기였다).
당연히 방값은 비싸고 시설은 가격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작은 마을의 밤은 도시의 밤보다 어두웠고 그레이트오션로드 한복판에서 잔다는 생각이 들어 깊게 잠들었다.
다음 날 눈을 뜨니 다른 대륙의 바다가 있었다.
작은 마을 끝에는 해수욕하기 더없이 좋아 보이는 해변과 공원이 있다.
이른 아침에 잔디밭에 물 주는 풍경 너머로 보이는 바다가 좋아 보인다.
잠시 해변을 바라보다 다시 길을 나섰다.
원래는 멜번으로 돌아가는 방향으로 가야 하지만 조금 고민하다 숙소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반대 방향의 'The Grotto'로 갔다.
투어에서는 가지 않는 곳이라 정보는 적지만 우연히 구글 지도에서 발견하고 가고 싶어 졌다.
첫 번째 지점을 시작으로 계속 길을 가다 멈추다를 반복했다.
그레이트오션로드의 대표 명소들이 대부분 오분 거리에 몰려 있기 때문에 바쁜 시간이었다.
그렇게 게걸음 하듯 옆으로 조금씩 달려가면서 매번 감탄을 반복했다.
사실 이 지구, 이 우주 전체를 기준으로 보면 같은 장소에 있었던 거나 다름없는데도 모두 달랐다.
마침내 하이라이트인 12사도 헬기투어 장소까지 왔다.
그레이트 오션로드를 달리면 호주 사람들의 관광에 대한 마인드를 여실히 알게 된다.
우리나라였다면 각종 해산물을 팔고 기념품을 늘어놨겠지만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로 중 하나인 이곳엔 그 어디에도 상인이 눈에 띄지 않는다.
세계 최고의 도로에서 이들이 하는 유일한 장사는 헬기투어다.
작은 안내소 겸 매점 하나에 헬기장이 그레이트오션로드 관광지에서 돈을 쓸 유일한 일이었다.
헬기투어는 너무 만족이었다.
놀이기구를 제일 싫어하는 나지만 하늘에 떠서 눈을 뜨니 아름답다는 생각만 남는다.
귀마개를 껴야 하는 소음 속에 있으면서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입을 벌리고 차로 반나절을 달려온 길을 15분 만에 다녀왔다.
헬기투어는 그레이트오션로드가 어떤 길인지를 15분 만에 보여줬다.
세상에 내가 있을 곳이 땅과 바다만이 아니라는 것, 내가 하늘에도 존재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확실히 호주에서 가장 기억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또 달렸고 호주의 마지막 밤을 지낼 숙소에 도착했다.
차를 가지고 시내로 들어가긴 싫어서 멜번이 아닌 질롱에 숙소를 얻었다.
시내가 아닌 조금 외곽에 있는 한 농장이었다.
마지막을 어떻게 기념할지 생각하다 와인농장에서 운영하는 숙소를 빌렸다.
아스팔트 도로를 벗어나 잠시 흙길을 달려 포도밭에 도착했다.
숙소는 포도밭 앞에 있는 농장에 딸린 집이었다.
농장 주인은 엄마와 함께 왔다는 나에게 너무나 러블리하다며 와인 한 병을 골라 가져가게 했다.
호텔이 아닌 누군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집이었다.
친절한 주인은 집을 소개해주고 냉장고에 가득한 먹거리를 보여주며 마음껏 먹으라고 말해줬다.
과일과 달걀, 시리얼과 냉동실에 얼린 각종 빵까지 호주 가정집의 냉장고였다.
빈틈없이 채워진 냉장고 덕에 뒷마당이 보이는 빛이 잘 드는 식탁에서 따끈한 빵과 파스타를 내놓고 먹을 수 있었다.
빛이 잘 드는 넓은 집이 너무나 맘에 들었다.
시드니나 멜버른 한복판에서는 느끼지 못했을 호젓함이 밀려왔다.
밤에 포도밭을 바라보며 여행을 마무리하기 딱 좋았다.
그렇게 포도농장 위로 떠오른 남반구의 별자리를 보며 여행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