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재력 모두 되는 남친같은 도시 프라하
다들 체코가, 프라하가 예쁘다고 유난을 떨어대길래 나는 체코의 특산물이 낭만인 줄 알았다. 그런데... 환상이란 깨지라고 있는 법이고 내 환상은 체코 입성과 동시에 깨졌다. 와장창창창.
체코는 얼마나 예쁠까?
프라하를 알게 된 후로는 막연하게 체코가 유럽에서 가장 예쁜 나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TV에서 체코를 소개하면 낭만이란 말이 빠지지 않아서 나는 체코의 특산물이 낭만인 줄 알았다.
상상 속 프라하는 내가 가시는 걸음마다 누군가 꽃을 뿌려줄 것 같은 그런 도시였다.
하지만 십 년쯤 품었던 기대는 기차에서 내리면서 파사삭 깨졌다.
파사삭은 아니지만 진짜로 소리가 났다.
비와 함께 도착한 프라하 기차역은 어수선했다.
기차역을 빠져나와 처음 마주한 풍경은 다름 아닌 싸움판이었다.
다른 유럽사람들과도 조금은 다른 이목구비의 사내들이 소리 지르며 싸우는 모습이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프라하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다.
설마 프라하의 연인이란 드라마를 본 중학생 소녀의 낭만이 한때 초딩 남자애들의 낭만이었던 야인시대로 장르가 변할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 도시는 소매치기에 대한 악명도 높아서 아름답다는 풍경을 보기도 전에 주눅이 들었다.
뮌헨에서 프라하까지 5시간 43분을 들여 도착했는데 날씨만 봐도 이 도시가 나를 반기는 것 같지는 않다.
프라하는 낭만과 사랑이 피어나는 도시였거늘...
우리의 첫 만남이 그리 부드럽지는 못했다.
갑자기 프라하의 낭만이 전래동화처럼 느껴졌다.
조각난 환상이 다시 붙은 건 야경을 보면서다.
쫄았던 정신을 가다듬고 둘러본 프라하는 확실히 예뻤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밤이었지만 낮보다 사람이 더 많아진 느낌이 들어서 나도 분위기에 휩쓸려 여기저기 걸어 다녔다.
다른 유럽과 크게 다른 풍경은 아니지만 조금 더 오밀조밀한 밀도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도시 전체가 작게 모여 있는 느낌이 들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아마도 중세시대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는 탓 같다.
처음 만들 때 보다 넓어진 적이 없어 보이는 좁은 골목길은 사람이 많으면 마주 오는 사람과 자연스럽게 눈을 맞춰야 할 정도로 좁고 구불거렸다.
옛 건물 이외에도 프라하의 건물은 특이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해서 도시 속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프라하의 골목엔 친근함이 있다.
다른 도시에는 주요건물, 그러니까 왕과 귀족들의 건물만 남아 있지만 프라하는 평범한 사람이 다니던 흔적이 보인다.
카를교 건너에 보이는 꼭대기 성을 빼면 큰 건물도 별로 없다.
나 같은 서민, 평민이 거닐던 나와 닮은 사람들의, 내가 진짜 중세에 살았다면 매일 걸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프라하의 낭만은 어딘가 현실적인 부분이 있다.
내가 이 도시의 과거에 살았다면 어땠을지 궁금해지고 상상하게 만든다.
사실 프라하의 야경은 생각보다 호불호가 갈린다.
체코의 아기자기함이 주는 분위기는 특징이라 할 정도다.
하지만 다시 말하면 그건 규모가 작고 큰 볼거리는 없단 말이다.
야경이 유명하다는 말만 듣고 홍콩이나 뉴욕의 반짝이는 야경을 생각하면 실망한다.
프라하에는 높은 건물도 현란한 조명도 없다.
중세라는 한 시대를 품은 건물들만 은은히 빛날 뿐이다.
화려해서 유명한 야경이 아니라 낮을 그대로 옮겨 밤으로 가기 때문에 아름답다.
대도시에서는 보지 못할 은은한 아름다움이 프라하의 야경이다.
구름이 잔뜩 낀 채로 어둠으로 조금씩 넘어가는 군청색 하늘 아래서 시선이 모이는 곳엔 조명을 내뱉는 프라하성이 있다.
거리의 악사들이 가장 빛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프라하의 야경을 느끼려면 은은하고 부드러운 맛을 봐야 한다.
체코의 현실적 낭만이 피어나는 또 다른 장소가 있다.
바로 마트다.
무작정 들어간 마트에서 혼자 먹기에는 많은 음식을 바구니에 넣었지만 100코루나도 안 된다.
1000코루나 지폐를 꺼내려던 손이 민망해진다.
당시 환율로 5000원도 안 되는 돈이었다.
영수증에 낭만이 피어난다.
물가 덕분에 체코에서는 유럽 여행 중 느껴본 적 없는 금전 감각으로 살았다.
프라하를 돌아다니며 이유를 알 수 없는 편안한 마음이 든다면 그건 물가 덕분이다.
그 물가는 맥주에서 가장 빛을 발했으며 식당과 길거리 간식을 먹을 때도 빛을 보였다.
프라하의 첫인상이 그리 좋지는 못했지만 금세 사랑에 빠졌다.
말하자면 프라하는 얼굴과 재력을 갖춘 남주였다.
흔한 드라마 스토리텔링이 기대-실망을 거쳐 별로라고 생각했던 남주와 사랑에 빠지듯 나도 프라하와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
프라하는 내가 주인공이 되는, 충분히 사랑하고 싶은 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