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예쁘던 이유
Christmas.
봄신상이 나오는 때에 갑자기 철 지난 소리를 하나 싶겠지만 내가 본 미국의 크리스마스는 미국을 전반적으로 설명하는 하나의 문화였다.
무엇보다 미국 여행을 예쁘게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다.
미국에 대해 가장 선명하게 남은 기억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이다.
내가 미국에 도착한 날은 블랙프라이데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은 크리스마스였다.
감히 서양문화권에서 가장 화려한 시즌이라하겠다.
뉴욕의 겨울은 사탄도 무의식 중에 캐롤을 부를 정도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퍼져있다.
‘나홀로집에’가 근본 없이 크리스마스특선영화로 등극한 것이 아니다.
그 유명한 록펠러센터의 점등식도 바로 뉴욕에서 열린다.
점등식에서는 록펠러 트리에 불이 켜지는 단 한순간을 위해 모이는 뉴요커와 관광객들이 따듯하도록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스타들이 트리 앞이라는 얼토당토 못한 무대에 모여 노래를 부른다.
한 장소에 모이는 자체가 기적인 스타들이 나무막대기에 불 켜지는 날을 핑계로 한 자리에 모이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주변은 뉴욕의 추위를 무시하고 온종일 대기하는 사람들로 마비된다.
들어갈 때도 마음대로 못하고 나갈 때도 마음대로 못나오는 이 행사를 위해 기저귀를 차고 오는 사람들도 있다.
이 행사를 위해 뉴욕에 오는 사람도 있지만 체력과 체온, 인내심, 인류애가 요구 되는 행사이기 때문에 나는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점등식 다음 날 모든 뉴욕 여행자가 그렇듯 버릇처럼 타임스퀘어 일대를 어슬렁거리다 유난히 많은 사람과, 유난히 밝은 트리 앞에서 ‘아, 이게 그거구나.’하며 입을 열고 사진을 찍었다.
그 뒤로도 이 트리를 지나칠 일은 많았는데 사진을 많이 찍는 사람이 아닌데도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켜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록펠러센터 트리는 정말 세계 최고였고 한 가운데에서 빛나는 스와로브스키의 별장식 가격을 상상할수록 가슴이 뛰었다.
트리에 달린 전구 보다 구경꾼이 많고 별장식 보다 카메라 플래시가 더 반짝거리는 이 트리는 겨울 뉴욕의 상징이다.
록펠러센터 이외에도 뉴욕 곳곳엔 크리스마스와 트리점등식이 있다.
나는 브라이언트파크의 점등식을 봤는데 공원의 스케이트장에서 미국 국가대표 스케이트 선수들의 아이스스케이트쇼와 함께 트리가 켜진다.
그곳에서 아빠 목마를 탈 정도로 어린 아이가 흥분해서 부르는 징글벨 노래를 전세계인이 함께 부르던 순간은 앞으로도 느껴보지 못할 가장 크리스마스다운 순간이다.
록펠러트리 못지않은 화려한 트리들은 미국 곳곳에 있고, 호텔과 백화점들은 건물 자체가 트리가 되고, 집집마다 리스 장식을 해둔다.
규모 있는 공원 마다 펼쳐지는 크리스마스마켓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온 미국이 이 정도로 크리스마스에 열병을 앓지는 않는다.
미국 동부, 뉴욕, 그 중에서도 맨해튼이 조금 유난스럽다.
뉴욕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갈수록 날짜는 크리스마스에 가까워졌지만 미서부는 이렇게까지 화려한 크리스마스를 보내진 않았다.
사실 LA같은 곳은 크리스마스를 보내기엔 야자수가 너무 많다.
실제로 크리스마스 당일을 보낸 샌프란시스코의 트리는 조금 덜 매력적이었다.
우리에겐 낯선 문화가 주는 하루짜리 빨간날이며 연인들의 이벤트 정도지만 미국 문화에서 크리스마스는 명절이고 연휴다.
무슨 말이냐면 크리스마스 이브와 당일, 이어지는 주말까지 미국은 정지한다.
블루보틀, 인앤아웃 같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프랜차이즈는 물론 백화점과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쉽게 말하면 나와 같은 집도 가족도 없는 여행자는 이날 굶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내가 선택 가능한 식당은 3시간 웨이팅을 해야하는 치즈케이크팩토리 정도였다.
울며 스테이크 먹기로 선택한 그 식당에 앉아 가족과 함께 명절을 보내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난생 처음 혼자 밥 먹는 일이 외롭다고 생각하며 혼자 6만 5천원 어치 식사를 했다.
크리스마스 당일은 더욱 끔찍해서 불 꺼진 인앤아웃을 지나 보딘베이커리에서 혼자 클램차우더 스프를 홀짝거리다 더 이상 문을 연 정상적인 식당이 없음을 확인하고 일찍 공항으로 도망쳤다.
크리스마스는 동양권에서는 이벤트지만 서양에서는 명절, 즉 가족과 함께 집에 있어야 하는 날이다.
종교를 넘어 미국 문화를 이루는 축이 되는 중요한 날이기 때문에 종교적 의미를 담은 ‘Merry Chrismas’라는 말과 문화적 의미를 담은 ‘Happy Holiday’라는 말 중에 어떤 인사를 하는지만 가지고도 싸움이 벌어진다.
간단한 인사일 뿐인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미국의 역사와 함께 제법 복잡한 일이라서 어떤 인사를 하는지만 봐도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이나 인종차별을 할지에 대한 짐작 정도는 가능하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명절을 소비하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개인에게는 크리스마스데이가 명절이지만 각종 기업들에겐 소비를 위한 날이다.
추수감사절에서 크리스마스로 이어지는 기간엔 세일을 비롯한 모든 마케팅이 동원된다.
겨울 미국의 쇼핑몰은 명절 분위기를 이용해 지갑을 털어가려는 자본주의 문화의 트랩이다.
다른 지역 보다 뉴욕의 크리스마스가 화려하고, 뉴욕 중심가의 록펠러센터를 비롯한 백화점에 수억을 들여 가장 화려한 장식을 하는 이유는 당연히 순수하지 못하다.
추수감사절 – 크리스마스 – 볼드랍으로 이어지는 이 구조 속에서 뉴욕의 상점과 호텔이 올리는 수익이 어느 정도일지에 대한 연구는 경제학자들이 이미 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아이와 다름없는 뇌구조를 가진 나같은 여행객에게 그런 복잡한 TMI들은 알바 아니다.
눈과 비가 번갈아 오면서 바닥은 질척거리고 빌딩 사이로 달려드는 칼바람에 손등이 갈라지면서도 뉴욕의 12월을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은 즐거웠다.
터진 손등에 핸드크림을 치덕치적 바르면서 들어간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캐롤을 듣기 위해 다시 뉴욕에 가고 싶다.
크리스마스로 미쳐 날뛰는 그 도시를 걸으며 록펠러센터 앞에서 트리와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싶다.
12월이다. 크리스마스다. 뉴욕이다.
연말이면 크리스마스에 갇히는 그 작은 섬 맨해튼.
하나님의 은총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도 축복이 가득한 곳.
크리스마스 시즌엔 나홀로 집에가 아닌 나홀로 뉴욕에 가야한다.
너무 예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