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레 자전거 여행

걸어도 좋고 자전거를 타도 좋은 인레의 하루

by 사십리터


'기대만큼'하긴 참 어렵다. 인레는 그 어려운 '기대만큼'이었다. 예상만큼 조용하고, 생각처럼 한가했다. 내가 바라던 한가로움이 거기 있었다.




1. 웰컴 주스

어둠과 추위에 물든 인레에 도착했다.

이래저래 오늘따라 야간버스가 힘들다.

버스가 도착한 곳은 정확히 말하면 인레가 아니다.

인레는 마을의 지명이라기보단 호수의 이름이다.

인레 호수를 보기 위해 여행자들이 거점으로 삼는 '낭쉐'가 내가 가려는 마을이다.

낭쉐까지는 버스에서 내린 뒤 조금 더 가야 한다.

낮이라면 택시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이 픽업트럭 한 대만 있다.

야간버스에서 내린 외국인 여행자들은 선택권 없이 픽업트럭에 올라타 요금을 셰어 하게 된다.

각자 숙소를 말하고 트럭에 탔다.

아이들이 있는 인도 가족이 제일 먼저 내렸다.

저렴한 여행자 마을이 아닌 인레 호수 안에 있는 고급 리조트에 묶나 보다.

부럽네.

인레 호수 안에 있는 수상호텔들은 시설과 경치가 좋고 호수를 즐기기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비싸다!

때문에 보통 배낭 여행자들은 '낭쉐'의 저렴한 숙소를 이용한다.

내 숙소는 그중에서도 오래된 호텔이라는 집시인.

트럭에 타고 있던 이탈리안 커플도 같은 숙소에 내렸다.

이변이 없으면 이 사람들과 비슷한 코스로 돌아다니겠군.

20170114_092815.jpg 인레 호수 안의 수상 호텔

규모가 작은 숙소라 새벽에 직원이 있을까 싶었는데 정말 괜한 걱정이었다.

사장님이 참 인자하시군.

어느새 나타난 사장님 딸이 웰컴 주스까지 나눠 줬다.

야간버스를 타기 위해 갈증을 참고 있던 깔깔한 목에 달달한 주스가 넘어가니 참 시원하다.

미얀마의 주스들은 과일이 아니라 시럽 느낌이라 별로였는데 이런 때 먹으니 딱 좋다.

체크인을 하면서 언제 물어봐야 할지 고민했던 보트 투어를 사장님이 알아서 설명해준다.

IMG_0137.JPG 인레 호수의 풍경

인레 호수는 석촌호수 같은 모습이 아니다.

규모가 워낙 커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호수의 형태가 아닌 강이나 바다에 가깝다.

휴양지라고 해도 호수 옆에 노천카페가 즐비한 해수욕장 같은 모습이 아니다.

호수를 바라보며 여유를 즐기려면 호수 한가운데 있는 수상호텔에 머물러야 한다.

하지만 보통의 여행자들은 인레 호수에서 보트투어를 한다.

5명까지 탈 수 있는 이 배를 하루 동안 빌리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인레호수를 돌아볼 수 있다.

오늘은 좀 피곤하니까 내일 투어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체크인을 했다.

그런데 사장님이 오늘 투어를 하면 나까지 5명이 되기 때문에 가장 저렴한 요금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혹한다!

만달레이 택시투어가 인원 부족으로 일정이 꼬였던 생각이 나면서 정신이 번쩍 든다.

오늘 해야겠다.

피곤한 쯤이야 여행자의 숙명이지.

아침 식사 후 모여서 출발하기로 하고 객실로 갔다.




2. 휴식

짐을 풀고 최소한의 준비만 한 채로 조식을 먹으러 갔다.

쉬고 싶지만 투어 시간에 맞추기 위해선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서두른 보람 없이 투어가 취소되었단 말을 들었다.

오늘 투어를 가기로 했던 사람들이 일정을 취소했단다.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느긋한 아침식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정말 맘대로 되는 일이 없구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쉬어야겠다.


하지만 야간버스의 어설픈 잠도 잠이었는지 잠은 쉽게 오지 않는다.

게다가 호텔 바로 앞에 있는 선착장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보트 모터 소리가 요란하다.

눈만 감고 있는 의미 없는 휴식을 중단했다.

나가자.

나가서 놀자.




3. 낭쉐 산책

주변 산책이나 좀 해보려 했으나 소문대로 정말 할 일이 없다.

너무너무너무 한적한 마을이다.

여행자 위주로 만들어진 마을이다 보니 호텔과 여행자들을 목적으로 하는 식당, 렌털 샵만 있을 뿐이다.

그나마 낮이라 텅텅 빈 가게들 뿐이다.

정박한 배에 실린 인레 호수의 특산물 토마토 구경 정도가 볼거리의 전부다.

쪽배에 토마토가 그득한 모습이 재밌긴 해서 한참 보고 있었다.

나는 멋쟁이 토마토를 보러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타고 여기 왔나 보다.

중심가의 시장도 같은 풍경의 반복일 뿐이다.

보통 인레에 온 사람들은 하루 종일 보트투어를 하기 때문에 낮 시간은 참 한가하다.

자전거를 빌려 근처 와이너리나 온천에 가는 사람들만 간간이 보일 뿐이다.

20170113_091507.jpg 인레호수의 특산품 토마토를 데려가는 배

하지만 그게 참 좋았다.

아무 일도 안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낯선 곳을 걷는 것.

그게 내가 미얀마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만족스러운 시간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혼자 다니는 여행자를 호객꾼들이 그냥 둘리 없다.




4. 자전거 기행

낭쉐에서 유일하게 복잡한 시장

인레는 중심부터 골목엔 모두 여행자를 위한 시설이 있다.

그 말은 어딜 가도 호객꾼이 있단 것.

혼자 조용한 산책을 하기엔 초단위로 사람들이 말을 건다.

멘트는 도를 아십니까 수준으로 똑같다.

"Hello~, How are you. I have a boat."

보트 투어를 제안하는 거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을 물리치려면 내가 뭐라도 하고 있단 티를 내야겠다.

백만 번쯤 고민하다 자전거를 빌리기로 했다.

왜 백만 번이나 고민했냐면...

난 자전거를 못 탄다.

싫은 건 절대 안 하고, 운동을 절대 싫어하는 나는 아직 자전거를 못 탄다.

예전에 유럽여행을 가기 전에 혹시 자전거가 필요한 일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딱 하루 배운 적이 있다.

그나마도 아파트의 작은 운동장을 돌아본 게 전부다.

그때 이후로 몇 년간 타본 적 없으니 처음 타는 거나 다름없다.

탑승이 가능 여부도 모르니 참으로 무모한 도전이다.

하지만 원래 자전거를 빌려 와이너리에 다녀오는 것이 인레 관광의 기본이다.

할 일도 없고 대여료도 싸니까 못 타도 본전이려니 싶어 숙소에서 자전거를 빌렸다.

한국에선 배울 생각 안들 것 같으니 이렇게 강제로 배워봐도 좋겠지.

부처님, 미얀마에서 경전 대신 자전거 배워가겠습니다.

불안한 눈빛의 직원이 건네 준 자전거를 어색하게 끌고 사람이 없는 골목으로 갔다.

나도, 자전거도, 인레도 모두 불안하게 자전거에 첫발을 디뎠다.




5. 국수의 응원

정말 다행히도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남몰래 속으로 춤을 추는 심정이었다.

100미터 단위로 멈추고 서고를 반복하고 차가 한대라도 오면 무조건 서고 사람들을 피하느라 엉망진창이었지만 그래도 굴러가는 바퀴에 흐뭇함을 느꼈다.

물론 주변으로 지나는 사람들은 내가 좀 이상하단 걸 느꼈는지 다들 피해 간다.

20170115_111149.jpg 낭쉐의 도로

인적 드문 골목을 몇 번 지나다 용기를 좀 얻어서 인레의 또 다른 관광지 온천에 다녀오기로 한다.

자전거로 40분쯤 걸리는 거리로 알고 있는데 2시간쯤 걸린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가지 뭐.

가는 길은 사람부터 트럭까지 모두 함께 가는 단 하나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삼륜택시, 화물트럭, 사람이 모두 다니는 2차선 도로에서 자전거를 처음 배운건 모두의 안전을 위해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그땐 메타세콰이어 길을 떠오르게 하는 한적한 시골길에 빠져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온천까지 가는 길은 가로수가 있어서 운치가 더해진 예쁜 시골길이다.

다른 여행자들이 많이 지나간다.

생각보다 좀 멀어서 땀 흘리고 물 마시고를 반복했다.

물로 주유하는 기분이다.

그러다 결국 사고를 쳤다.

대형트럭이 마주 오는데 길가에 있던 어떤 사람이 조심하라는 듯 지르는 소리에 놀래서 넘어졌다.

혹시나 싶어 긴 청바지를 입고 있어서 상처는 없다.

다만 넘어지면서 중심을 잡느라 손목으로 지탱했더니 오른쪽 손목이 좀 욱신거린다.

뒤에서 지나가던 자전거 여행자가 괜찮냐고 물어본다.

본래 이런 상황에선 아픔보다 창피함이 우선인 법.

자꾸 물어보는 그에게 난 자꾸 괜찮다고 말하고 돌려보냈다.

흙을 툭툭 털고 자전거를 끌고 계속 앞으로 갔다.

그러나 역시 좀 힘들다.

제법 많이 온 것 같은데 온천은 보이지도 않네.

10분쯤 더 가다 아무래도 온천은 포기해야겠단 생각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어차피 온천물에 들어갈 생각도 없었고 좀 멀리 자전거 연습을 할 생각이었다.

이땐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넘어지면서 자전거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

손잡이가 살짝 깨져서 브레이크가 한쪽으로만 작동되는 상황이었다.

뜻밖에 난폭운전을 하고 있던 거다.

20170113_142018.jpg 지나가던 길에 만난 퍼레이드, 무슨 행사였을까?

결국 밥이나 먹어야겠단 생각으로 식당을 찾아다녔다.

시장 옆에 위치한 여행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식당 '신요'로 들어섰다.

시원한 물을 마시면서 자전거를 계속 탈지 고민했다.

고민하다 보니 주문한 음식이 등장했다.

가격이 싸서 주문한 볶음 누들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그래서 자전거를 계속 타기로 했다.

기승전 없는 결론이지만 맛있는 국수를 먹으니 자전거가 타고 싶어 졌다.

자전거에 처음 도전하는 나에게 국수 한 그릇이 응원을 해주는 기분이었다.

'먹고 힘내'라고.

사실 나 스스로에게 응원한 셈이지만 뭐 어떤가.

혼자 다니다 보면 국수의 응원이라도 필요한 때가 있다.




6. 술 대신 햇빛에 취하다

레드마운틴와이너리의 입구

첫술에 배부를 순 없지만 이보단 좀 자전거를 잘 타고 싶다.

쨍한 하늘과 인적 드문 시골길, 낭만적인 자전거까지 모두 있었지만 내 자전거 실력만 없었다.

더위에 3번, 달려드는 트럭에 3번, 먼지바람에 3번, 구사일생으로 와이너리에 도착했다.

낯선 언덕 초입에 자전거를 주차하고 포토밭을 지나 걸어갔다.

예뻤다.

아홉 번의 지옥 끝에 찾아온 천국인가 싶은 풍경이다.

동남아에서 볼 수 없다고 생각한 포도밭과 와이너리가 주는 생경한 풍경이 현실같지 않았다.

위로 올라갈수록 풍경이 한 뼘씩 더 예쁘게 자라난다.

와이너리는 조용한 인레에 어울리는 관광지였다.

다만, 이렇게 고생해서 왔는데 와인을 마실 수 없어서 슬펐다.

이 더위에 처음 탄 자전거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마시는 와인에 취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이미 얼굴은 햇빛에 취해 달궈졌다.

와인잔을 잡고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를 쓸쓸하게 내려와 다시 자전거를 잡았다.

첫 자전거 강습은 이쯤에서 끝내야겠다.

20170113_151506.jpg 와이너리의 야외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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