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투어의 낭만
얕은 배 위에 앉으면 물살이 보내는 작은 신호까지 느껴진다.
눈을 감고 머릿속에 CG를 그려본다. 나는 지금 아무도 없는 호수 위를 한 발짝씩 걸어가고 있다. 내 발이 닿는 곳마다 내 호흡이 물결로 바뀌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원형으로 퍼져 나간다.
어제 자전거를 빌리면서 직원이 반가운 소식을 줬다.
5명이 모아져서 오늘은 보트투어가 가능하다!
최대 인원이 모였으니 요금도 가장 저렴하다.
5명이 함께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박 반나절 동안 인레 호수 위의 공방과 유적을 돌아본다.
제법 나이가 있는 독일 부부와 같은 숙소에서 함께 체크인했던 이탈리아 커플이 투어 파트너였다.
혼자에 익숙해져서 외로움에 면역이 있는데 이렇게 대놓고 외로워지는 날이 하루씩 찾아온다.
주름살이 생겨서도 둘이서만 여행 다니는 부부에 이탈리아 남자.
혼자였을 땐 몰랐던 외로움이 밀려온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나무 의자 5개가 주르륵 놓인 귀여운 보트가 기다린다.
얇고 긴 5인용 보트다.
8시에 가까운 시간이지만 호수엔 아직 찬 기운이 남이 있다.
독일 할머니는 얇은 패딩까지 입고 있다.
만달레이의 택시기사가 인레는 매우 춥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의자엔 구명조끼와 함께 담요도 한 장씩 준비되어 있다.
자전거 후유증 때문에 나무 의자가 아프지 않을까 싶었는데 방석이 깔린 의자는 생각보다 안락하다.
자리를 잡으니 사공이 배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모든 소리를 물속에 품어서인지 인레 호수는 고요하다.
그런 고요함 위에 모든 소리를 지우는 요란한 모터가 달린다.
맨 뒷자리에 앉았더니 모터에서 흐르는 소리와 기름 냄새가 퍼진다.
배가 얇아서 물이 온전히 느껴진다.
눈을 감고 물 위를 걷는 상상을 해본다.
내 발걸음마다 호흡이 떨어져서 원으로 퍼져나간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동그라미들이 호수 끝에 가서 비눗방울처럼 터진다.
눈을 뜨면 사람이 살고 있는 수상가옥이 보인다.
현실이 보여도 상상 속에 있는 것 같다.
선착장을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 낭쉐와는 다른 풍경이 시작된다.
이 작은 조각 보트에서 이렇게 큰 풍경을 만나다니.
이곳에서 수억의 해가 떠왔겠지만 내가 본 태양이 가장 멋지다고 장담한다.
쏟아진 햇빛이 모여 호수가 되었나 보다.
물 깊이를 보니 큰 유람선이 없는 이유를 알겠다.
깊어 보이던 물은 가까이서 보니 수초가 보일 정도로 얕다.
너무 큰 것에 올라타 있으면 작은 것은 볼 수 없다.
높고 깊어 보이던 것들이 정작 앞에 다가서면 참 작다.
그리고 그 작고 연약함이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에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물 위의 풀과 집 하나하나에 감동하다 첫 번째 공방에 내렸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물 위에서 살아갈 뿐 아니라 공방을 열고, 일을 한다.
그들의 삶이다.
실버 공방에서 그들 삶의 손짓을 보았다.
배에서 내리자 안내인이 나와 실버제품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설명을 듣고 물건을 구경하는 코스가 이어진다.
공방 구경을 마치고 수초와 수초 사이로 난 물 위의 골목길을 지났다.
수초 사이를 통과하는 기분이 생경하고 재미있다.
인레 보트투어의 목적인 수상마켓에 도착했다.
수백 대의 보트가 이미 정박하고 있다.
배에서 내리면 호수 가운데 있는 땅에 열린 시장이 보인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다.
시장이라면 응당 간식을 먹어야 하는 법.
시간을 잘못 알아서 아침도 못 먹고 나왔더니 튀김 냄새가 너무 유혹적이다.
춘권처럼 생긴 간식을 몇 개 사서 시장 구경을 나섰다.
관광객을 노리는 액세서리부터 볼펜을 파는 문구점에 도시락통을 파는 잡화점, 꽃가게 등등 없는 게 없다.
미얀마에서 볼 줄 몰랐던 털옷까지 있다.
실버공방에선 사지 않았던 은 장식품에 눈길이 간다.
아까부터 살까 말까 망설였던 은물고기가 달린 목걸이가 눈에 밟힌다.
내가 지닌 물건의 무게를 내가 짊어져야 하다 보니 여행 중엔 물건 사는 것에 참 까다로워진다.
고민 끝에 선물용으로 하나 구입.
가격은 공방보다 저렴했다.
흥정을 시도했더니 가격표를 보여주더니 원하는 가격을 말해보란다.
역시 처음 부른 값은 제값이 아니구나.
적당히 가격을 내려서 물고기를 한 마리 낚았다.
그만 돌아가려는데, 아이고....
어느 게 내 보트인지 모르겠다.
기억을 했어야 하는데 다 똑같은 배 사이에서 어느 게 내 배인지....
대충 맞는 것 같은 배를 찾아가다 이탈리안 커플을 만나 따라갔다.
길 잃은 거 티 안 나게 따라가야지.
그 뒤로는 공방의 연속이었다.
실크공방, 잎담배공방, 우산공방...
모두 적당히 신기했다.
이렇게 공방을 다니는 게 싫어서 보트투어와 인레가 별로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매일 보는 것도 아닌데 하루쯤 이런 것도 괜찮지 않나 싶다.
딱히 구매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니까.
풀이 실이 되는 모습이나 잎담배를 말아 피우는 모습 모두 처음인지라 호수 풍경 중 하나로 생각하니 재미있었다.
추가 요금을 냈기 때문에 우리의 코스는 인데인 유적지까지 이어진다.
점점 깊은 곳으로 가다 보니 풍경도 조금씩 달라진다.
정글 느낌도 나고 폭이 좁은 물길도 나온다.
간간히 물살도 튄다.
에버랜드에서 아마존 익스프레스를 타는 기분이다.
탐험 기분이 들 때쯤 호수 속에 숨겨진 유적지에 도착했다.
고대에 아틀란티스를 발견한 기분이 이랬을까?
작은 기념품점을 지났더니 마을 사람들이 운동회라도 하는 모양이다.
공을 차고 응원하는 모습이 참 즐거워 보인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 눈에 띄는 유적으로 향했다.
사실 유적이라 해도 미얀마에서 많이 본 파고다들이다.
하지만 미얀마에서 본 유적 중 가장 유적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언덕 위, 폭포 뒤에 숨겨진 유적엔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천연 유적이 가득하다.
어쩌면 우린 관리라는 이름으로 유적의 진짜 모습을 망치고 있나 보다.
나이가 들고 자연스럽게 부서진 유적도 충분히 근엄한데.
언덕을 올라 유적에 닿으니 등산 후에 산 아래를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반대쪽 산과 마을이 한눈에 보인다.
자유시간이라 다 흩어진 줄 알았던 일행들도 모두 여기에 모였다.
유적에서 내려와 마을 반대편으로 갔더니 남자아이 하나가 나타난다.
자신을 따라오란다.
다른 유적에 안내한 뒤 팁을 받을 심산인가 보다.
거절하고 다른 유적을 찾았다.
옆으로 지나가는 아이들이 안녕하고 인사하듯 머니, 머니 하고 지나간다.
맙소사.
개울가에서 수영하는 아이들을 보고 참 순진해 보인다고 생각한 게 5분 전인데.
아마 기브 미 초콜릿을 외치던 아이들의 마음과 비슷하려나.
조금 씁쓸하게 물가를 지나는데 뜻밖의 조우가 있었다.
만달레이에 가는 스피트 보트를 함께 타고 온 중국인들이 여기 있었다.
보트 타면 만나는 운명인가 보다.
서로 아는 척은 안 했지만 우스웠다.
여행자들은 참 넓은 세상을 향해 다니는 것 같지만 어쩌면 가장 좁은 곳을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 인지도.
마지막 목적지는 고양이 사원이었다.
물 위의 목조 사원인 '응아페짜웅'은 고양이들이 살고 있는 사원으로 유명하다.
원래는 승려들이 고양이로 묘기를 보여줬다고 하는데 요즘은 하지 않는다.
사실 고양이를 싫어하는 내 입장에서 크게 오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물 위에 이런 큰 사원을 짓고 찾아오는 것을 보니 미얀마인들의 신앙심이 느껴진다.
나라면 절대 물 위로 배를 타고 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견디고 신을 찾지 못할 거야.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아서 구석구석 보진 않았지만 어두운 실내에 들어오는 빛이 주는 풍경은 꽤 멋지다.
밟을 때마다 느낌이 오는 목조 사원과 그곳을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들.
인레 호수 투어의 마지막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일몰을 보기 위해 보트가 멈췄다.
하늘이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모터 소리도 멈춰서 강이나 바다가 줄 수 없는 호수 특유의 고요함이 오롯이 느껴진다.
물과 보트의 경계가 점점 흐려져서 낮은 하늘에 누워있는 착각이 든다.
손을 뻗어 호수에 담가본다.
주변에서 낚시 중이던 미얀마 어부들이 우리 보트로 다가온다.
사진을 찍으니 그들에게 팁을 줘야 한단다.
물고기는 딱 한 마리 잡은 어부는 보트 끝에 서서 묘기에 가까운 포즈를 잡아준다.
이 어부가 물고기로 버는 돈이 많을까 사진 찍고 받는 팁이 더 많을까.
경치를 방해하는 장사꾼이긴 하지만 그들의 몸짓은 아름답다.
인레 호수 어부들의 모습은 미얀마를 대표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노를 젓는 모습이 발레리나의 발끝과 손끝을 닮았다.
우아하고 섬세하다.
저무는 노을을 조명 삼아 움직이는 그들의 실루엣이 보인다.
호수는 어느새 밤하늘을 담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몰 속에 들어가 인레의 마지막 발걸음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