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을 위한 하루

심심해서 흥겨운 인레의 마지막 날

by 사십리터


인레의 마지막 날엔 최선을 다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는 그러려면 왜 거기까지 갔냐고 물을지도 모를 그런 시간을 꼭 쓰고 싶었다.




1. 한가함과 나태함 사이

눈을 뜨고도 한참을 감고 있었다.

할 일이 없었다.

할 일이 없는 게 좋아서 가만있었다.

아침 식사 시간도 지났지만 그냥 포기했다.

따듯한 샨누들이 좀 아까웠지만 게으름이 우선이다.

한가함과 나태함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기분이다.

도미토리의 모든 여행자가 밖으로 나가고 그제야 움직일 준비를 했다.

이렇게 평화로운 하루의 시작이라니.

인레에 오길 정말 잘했어.




2. 미얀마에선 개(가 사람을) 조심

할 일이 없어서 동네 개들과 열심히 놀았다.

골목마다 자리 잡고 낮잠을 자는 개들을 건드리며 돌아다녔더니 배가 고프다.

미얀마엔 개들이 참 많다.

미얀마의 개는 애완견도 유기견도 아니다.

집에서 키워도 우리의 애완 개념이랑은 다르다.

그냥 하루 종일 동네 길바닥에서 낮잠을 자다 잠자러 들어오는 곳이 있는 느낌?

유기견들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게다가 사람 병원도 부족하니 동물들이 아프다고 치료를 해주는 것도 아니다.

좀 떠올리기 싫은 장면인데 사고를 당해서 내장이 튀어나온 채 숨을 헐떡이는 개도 몇 번 봤다.

동네 아이들이 개를 장난감 삼아 끌고 다니고 던지고 때리는 것도 많이 봤다.

한 번은 막대기로 개를 때리는 어린애 앞에서 내가 참견할 자격이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낯선 내가 노려보는 것을 느끼고 그만두긴 하더라).

워낙 학대를 많이 받아서인지 사람을 무서워하고 주눅 들어 있다.

먹이를 던지면 피하는 아이들도 많다.

강아지들은 하나같이 애교 많고 달려드는데 크면서 학대받은 기억이 쌓였는지 조금 큰 개들은 다가가면 일단 도망간다.

심지어 공격해야겠단 생각도 못하고 도망가는 게 전부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좀 짠했다.

흔히 말하는 혈통도 없고, 잘 챙겨 먹는 아이들도 아니라 마르고 못생기기도 하다.

동정심을 느낄 생각은 없지만 이 아이들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는 좀 궁금해진다.




3. 늦은 점심시간

개들 간식을 챙겨주고 나니 나도 배가 고프다.

인레에서 꼭 가보고 싶었던 딤섬 가게가 있었다.

조금 먼 거리였지만 트립어드바이저에 소개된 딤섬을 생각하며 열심히 걸었다.

하지만 문을 닫았다.

시간을 잘못 알려준 가이드북에 욕을 하다 결국 시내의 식당으로 갔다.

노천 테이블에 앉아 포크 커리를 시켰다.

이 샐러드 소스가 참 맛있군.

고기가 좀 질기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누군가 내 앞에 나타났다.

만달레이 호스텔에서 만난 중국인이었다!

'뿅', '짠' 이런 효과음이 들렸던 거 같다.

이쯤 되니 미얀마가 작단 생각이 든다.

내 쪽지를(만달레이에서 나에게 호감을 보이는 그녀에게 작별인사 대신 'Have a nice trip'이라고 쓴 메모지를 남기고 왔었다) 봤다며 좋아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는 그녀와 포옹까지 하고 식당을 나올 수 있었다.

다신 볼일이 없을 줄 알고 낯간지런 짓을 한 건데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민망하군.




4. 낭쉐벅스

야간버스를 타기 전까지 뭘 할지 생각해야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이 간절하다.

설탕이 가득 든 미얀마식 아이스커피가 아닌 스타벅스에서 파는 그런 아메리카노가.

시간도 많으니 제법 괜찮은 커피를 판다는 카페(에버그린)를 찾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자 정말 괜찮은 커피가 나온다.

오랜만에 풍기는 원두향이 반갑다.

든든하게 커피를 놓고, 노트를 펼치고 일기를 쓰고 있으니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직원이 노래를 부른다.

지나가는 손님마다 인사하고 카페에 틀어 둔 노래를 따라 하는 유쾌한 직원이다.

영화 설정에서 나올법한 유쾌하고 발랄한 소녀다.

손님이 없는 시간이라 직원들끼리 손님용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는다.

채소 몇 가지에 반찬 한두 가지를 놓은 그들 밥상이 참 매력 있다.

직원들이 밥을 다 먹었을 때쯤 일어나 계산을 하고 와이너리에 재도전한다.

이번엔 택시를 타고 가서 꼭 와인을 마시고 와야지.




5. 음주가무

운이 좀 따라줬다.

마침 와이너리로 가는 여행자들이 삼륜 택시를 잡고 있어서 재빨리 합승했다.

자전거는 무리 인듯한 독일인 할머니 두 분이었다.

경운기 비슷하게 생긴 삼륜 택시를 타고 며칠 전 자전거로 달렸던 길을 다시 갔다.

땀 흘리며 가던 때와 사뭇 다른 기분이다.

와이너리에 도착한 택시는 내가 자전거로 갔을 때보다 더 높은 곳에 내려줬다.

두 할머니의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돌아갈 시간을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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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이지만 사람이 꽤 많다.

실내 레스토랑이 아닌 야외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난간 옆의 명당이다!

오크통으로 만든 조금 높은 테이블이 너무 맘에 든다.

직원에게 시음용 와인을 주문했다.

치즈 얹은 빵 3조각과 와인 4잔이 나온다.

이어폰을 꽂고 나만의 세상에 빠져들었다.

기분이 극상으로 치닫는 기분!

솔직히 와이너리 풍경이 엄청 아름다운 편은 아니다.

하지만 느긋하게 포도밭 옆 오크통에 앉아 술 한잔을 하며 음악을 듣고 있다면 누구나 웃음이 날 것이다.

분위기에 취하기 좋은 날이다.

미얀마에서 가장 운치 있는 시간이었다.

사색 따윈 하지 않는다.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여행은 생각을 하기 위해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생각을 비우기 위해 가는 것이기도 하니까.

내게 여행은 혼자서 찾아오지 못할 정도로 먼 곳에 지긋지긋한 기억과 잡생각을 유기하는 무책임한 행동이다.

그 어떤 철학적 생각에도 빠지지 않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 좋은 시간이다.

오로지 즐겁기 위해 즐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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