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여행자의 하루
유적지를 떠나 도시를 여행하면 볼거리는 적어진다. 하지만, 역설적이게 낯선 땅의 일상에 녹아들어 나도 그 도시의 사람인 기분이 난다.
숙소에 조식이 없는 덕분에 일찍 일어나야 할 핑계가 사라졌다.
따듯한 토스트 대신 얻은 단 시간에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11시가 넘어가고 배도 고파져서 슬슬 기어 나왔다.
오래간만에 원피스에 메이크업을 곁들인 도시인 st로 하루를 시작해본다.
베트남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제이도넛(미얀마의 도넛 체인점)에서 커피와 쿠키로 간식까지 먹었다.
체인점을 찾게 되는 걸 보니 도시에 온 게 맞나 보다.
도시와 가까워질수록 서울이 가까워진 것 같아 우울하다.
양곤은 미얀마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볼거리가 별로 없다.
미얀마에 입국하던 날은 그렇게 이국적이던 풍경이 그냥 평범한 건물로 보인다.
술레나 쉐다곤같은 뚜렷한 관광지가 있지만 전체가 관광지인 바간이나 인레와는 사뭇 다르다.
대도시 한가운데 관광지 몇 개가 덩그러니 있는 것이 도쿄나 상해를 여행하는 모양새와 다를 바 없다.
외국인 관광객도 호텔이나 유명 관광지에나 가야 조금 보일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더욱 현지인들의 삶에 가까워진 기분이다.
출퇴근하고, 장보고, 길을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난 타국의 사람들이 평소에 무얼 하고 사는지 항상 궁금하다.
나와 같은 행동을 다른 방법으로 풀어내는 삶이 보고 싶다.
여행지에 가서 굳이 시장을 찾는 건 진짜 그들의 삶을 알고 싶어서다.
도시에선 일부러 그런 곳을 찾지 않아도 곳곳에 일상이 존재한다.
좁은 여행자 거리에서 모든 걸 해결하는 인레나 바간에선 볼 수 없는 현지인들의 진짜 생활이 느껴진다.
다른 사람의 삶에 끼어들고 파고드는 기분이다.
그 속에 섞여 있다 보면 이곳을 떠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익숙함에 젖어든다.
오늘 미션은 시내버스 타기다.
양곤에선 해외에서 수입한 중고버스를 그대로 쓴다.
정확히 말하면 도색을 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한국 버스임을 강조하려고 한글을 지우는 게 아니라 다시 쓴다고 한다.
그러나 도색을 한다고 중고버스가 새 버스가 되는 건 아니다.
버스 노선도 알아보기 힘들어서 자연스럽게 외국인들을 타지 않게 된다.
하지만 한국에서 운행하면 불법일만한 낡은 버스를 타보는 것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해보는 놀이 아니겠는가!
최대한 낡고 덜컹거리는 버스를 탈 수 있길 기대하며 중심가 정류장으로 갔다.
미얀마에서 난 문맹이기 때문에 버스 차장에게 목적지를 물어봐야 한다
하지만 만달레이에서 픽업트럭을 기다릴 때처럼 지나가는 트럭에 소리 지르진 않아도 되니까 훨씬 편하다.
잠시 후 옆에 있던 사람이 앞의 버스를 가리키며 "You."라고 외친다.
"인야"라고 하는 걸 보니 내가 인야에 가는 버스를 찾고 있는 걸 들었나 보다.
인상을 찌푸린 채로 친절을 베푼 아저씨한테 감사를 표시하고 버스에 탔다.
기대에 못 미치는 고급 리무진 버스다(리무진이라고 쓰여 있었다, 한글로).
에어컨도 나오는 고급 리무진에 타고 바깥 구경을 했다.
한국에선 관광버스였을 이 버스는 미얀마까지 이민을 왔다.
한국은 이미 신나게 돌아다녀서 해외 구경이 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빚 갚으러 해외까지 팔려 온 걸까?
꽤 기구한 운명의 중고버스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버스의 속도를 말하자면 내 동생이 2살 때 걸어가던 속도랑 비슷하다.
앞으로 가는 게 아니라 넘어지는 게 목적이었던 그 당시의 걸음마랑 견줄 속도감이다.
시간, 장소 안 가리는 양곤의 교통체증 속에서 나는 양곤 시내 구경만 실컷 했다.
영원히 호수는 없을 것 같을 때쯤 차장이 인야라고 소리친다.
버스에서 내려 그대로 인야호수로 바로 달려가려고 했으나...
너무 덥다.
반사적으로 바로 앞에 보이는 대형 쇼핑몰로 빨려 들어갔다.
인야호수 근처가 양곤의 부촌이라더니 명성에 걸맞은 시원하고 쾌적한 쇼핑몰이다.
팍슨센터나 만달레이의 다이아몬드 플라자는 거의 폐업상태던데, 여긴 매장이나 구조가 서울의 쇼핑몰과 똑같고 사람도 많다.
햇빛 대신 에어컨을 쬐며 돌아다니다 아이스크림 매장에 이끌려 두리안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두리안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교 때가 처음이었다.
싱가포르의 시장 근처를 걸어가며 처음 느낀 두리안은 눈이 아닌 코로 봤다.
어릴 때 이미 냄새로 음식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과일이기 때문에 그 뒤로도 먹을 기회가 있어도 먹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스크림이라면 좀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주문하고 나니 가격이 생각보다 너무 비싸다.
제일 작은 사이즈가 3700짯.
이건 한국에서도 비싼 가격인데.
제발 맛있어야 할 텐데.
하지만 역시 입에 들어오는 순간 맛이 아닌 냄새가 먼저 느껴진다.
두리안은 맛과 냄새 둘 중 하나에 승복하기 마련인데 난 냄새에 굴복한 쪽이다.
후회하며 아래층 시티마트에서 가글 용도로 1000짯 짜리 수박주스를 샀다.
잔디밭에 앉아서 수박주스나 먹을 생각으로 쇼핑몰 맞은편의 인야호수로 갔다.
하지만 생각 같지 않다.
양산 없이 찾은 인야호수는 화생방 훈련장이나 다름없다.
산책은 불가능하다.
벤치에 앉기도 불가능이다.
물론 인적도 드물다.
그나마 있는 사람들은 그늘막이 있는 벤치 속에 숨어있다.
의자에 앉는 게 아니라 올라타서 우산을 쓰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너네 참 극한 데이트를 하는구나.
결국 인야호수의 한가로운 산책이 얼마나 꿈같은 일인지를 깨닫고 일정을 변경해 술레파고다로 간다.
양곤의 랜드마크이자 중심인 술레 파고다는 시내를 돌아다닐 때 이정표가 되어준다.
도쿄타워나 에펠탑 같은 존재랄까?
출입구도 여러 개다.
나는 육교와 연결된 출입구로 들어갔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니 남자가 하나 따라붙는다.
어디서 왔냐 미얀마에서 어디 어디 갈 거냐 등등을 캐묻는다.
좀 귀찮았지만 인레가 홈타운이라는 이 사람과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더 길어지면 안내해주겠다고 하면서 가이드팁을 달라고 할 기세다.
그를 적당히 떨어뜨리고 파고다를 한 바퀴 돌았다.
이미 너무 많은 파고다를 봐서인지 큰 감흥이 없다.
미얀마에 온 첫날에 봤다면 멋지다고 생각했을 텐데.
번쩍이는 황금빛 사원보다 바간이나 인데인 같은 유적이 훨씬 멋지다.
미얀마 사람들에겐 여기가 더 중요한 존재겠지만 황량한 사원의 촉감이 그리워진다.
감흥 없이 술레를 둘러보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 목적지는 사쿠라타워다.
양곤 중심에 있는 건물인 사쿠라타워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양곤은 특별한 전망대가 없는 도시라 사쿠라 타워에 있는 레스토랑이 야경명소이자 전망 명소다.
미얀마의 물가 수준을 고려했을 때 고급 레스토랑이지만 미얀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데 이 정도는 하고 싶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미얀마에서 큰돈 쓸 일이 없었기에 마지막으로 비싼 밥 한 번은 먹을 수 있다.
밖이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무난해 보이는 코스요리를 주문했다.
코스요리라기엔 좀 비어 있는 구성이지만 기분 내기엔 적당하다.
별거 없는 스테이크와 유치한 맛의 스파게티가 꽤 먹을만하다.
허기와 분위기로 삼키면 뭔들 맛없을까.
완전한 야경까지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질까 싶어서 일몰 직전에 나와야 했다.
매우 아쉬운 마음으로 근처 마트에서 인레에서 사지 못한 레드마운틴 와인을 사서 숙소로 돌아갔다.
마지막 밤이 많이 아쉬워서 양곤에서 꼭 가야 한다는 차이나 타운 꼬치거리에 가봤다.
하지만 혼자 앉아서 즐길만한 분위기는 아니다.
동행이 있었다면 맥주 한잔으로 마지막 밤의 아쉬움을 달래기 딱 좋았을 텐데.
맥주 대신 외로움만 원샷하고 돌아와 마지막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