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끝의 풍경
끝났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까?
알람을 무시할 정도로 피곤하다.
아니면 침대가 편했나.
덕분에 일정이 꼬였다
여행 막바지라 방심했다.
날이 뜨거워지기 전에 움직이려던 일정이 두어 시간씩 밀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깐도지 호수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어슬렁어슬렁 나가본다.
하지만 택시를 타고 도착한 깐도지는 생각과는 좀 달랐다.
유원지 느낌을 기대했으나 사람도 별로 없고 여기저기 공사 중이다.
인 야호수랑 비슷한 느낌이다.
마땅한 레스토랑도 안 보인다.
게다가 덥다.
양산과 선글라스로 무장을 했지만 뜨겁다.
결국 깐도지를 나와 쉐다곤으로 향했다.
파고다의 나라 미얀마에 단 하나의 파고다만 남는다면 그건 쉐다곤이 될 것 같다.
랜드마크 술레도 쉐다곤 옆에 둔다면 평범한 동네 불탑이다.
저 멀리서 쉐다곤의 끄트머리만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감동을 느껴서가 아니라 그 크기에 압도되어서 든 생각이다.
온갖 파고다를 보고 다녀서 어떤 새로운 파고다를 봐도 특별한 느낌은 없었는데 확실히 다르다.
쉐다곤 자체도 크지만 쉐다곤 가는 길과 주변 또한 이미 테마파크 같다.
살짝 밀려오기 시작한 배고픔과 더위를 양산으로 가리고 황금빛 불탑을 향해 걸었다.
쉐다곤을 향해 길게 늘어선 노점은 사람이 모여든다는 증거다.
노점에선 음식도 많이 팔고 사탕수수가 많이 보인다.
처음엔 바닥에 수북하게 쌓인 이것들이 다 뭔가 했는데 사탕수수를 통째로 짜낸 찌꺼기들이다.
아직 갈길이 머니 길동무로 하나 데려가야겠다.
내 팔뚝 굵기쯤 되는 사탕수수를 기계에 밀어 넣으니 한 대접 물이 나온다.
거기에 얼음을 타서 비닐봉지에 넣고 빨대를 꽃아 준다.
종이컵도 플라스틱 컵도 아닌 생경한 컵이다.
얇은 비닐봉지 너머 사탕수수가 손부터 달게 한다.
공복에 차가운 얼음과 단물이 들어오니 수액 맞는 기분이다.
좋다.
자판기 커피도 1000원짜리가 있는데 이 시원함이 500짯이다.
쉐다곤은 아름답지만 뜨겁고 비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기 위해 신발을 맡기고 검문을 받았다.
날 현지인 줄에 세웠던 경비원이 내가 외국인인걸 알고 바로 줄을 바꿔준다.
양곤에 돌아와서 부쩍 현지인 취급이 늘었다.
그새 물이 많이 들었나 보다.
하지만 입장료는 철저하게 외국인 요금을 받는다.
8000짯.
미얀마에서 낸 최고 비싼 요금이다.
랜드마크답다.
입장료를 내면 주는 스티커를 받아 붙이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생각보다 높이 올라가서 양곤 전경이 보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지나니 드디어 쉐다곤이 보인다.
양곤에 도착한 첫날 어둠 속에서 처음 미얀마를 느끼게 해 준 쉐다곤.
공항에서 시내까지 가는 조금 지루한 길에서 스친 쉐다곤은 미얀마를 기대하게 했다.
특별히 밝은 조명도 없는 주변 덕에 쉐다곤은 마음껏 빛나고 있었다.
낮에 보니 그 영롱함은 좀 덜했지만 생각은 더 많아진다.
이제야 내가 미얀마 여행을 했단 생각이 든다.
정말 볼 거 다 봤구나.
진짜 마지막이구나.
그런 헛헛한 생각이.
구석구석에 있는 부처를 만나고 쉐다곤을 나왔다.
택시 기사들을 지나 근처의 시민공원으로 갔다.
people's park 주제에 입장료가 있는 괘씸한 공원이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들어가 봤겠지만 나는 입구에 있는 컬처밸리에서 점심만 해결한다.
피자집 등 몇몇 식당과 상가가 있었으나 매우 한가하다.
대체 미얀마 쇼핑몰들은 사람이 이렇게 없는데 어떻게 장사를 하는 걸까.
그나마 사람이 보이는 YKKO로 들어갔다.
고급 카페 느낌이다.
메뉴 보는 나를 직원이 부담스럽게 본다.
부끄러워서 메뉴 고르기가 힘들다.
어렵게 결정한 메뉴가 지금 안된단다.
결국 직원이 추천하는 메뉴를 주문했다.
의외로 맛있다.
배고픈 첫끼여서인지 미얀마에서 먹은 모든 음식을 통틀어 가장 맛있었다.
다른 메뉴도 먹어볼까 싶었지만 양곤 순환열차를 타기 위해 가게를 나왔다.
시민공원 근처에서 버스 정류장을 찾는데 없어서 결국 쉐다곤까지 올라왔다.
있는데 길을 잃어서 못 찾았단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런데 이 많은 버스 중에서 술레 가는 버스 하나가 없다.
설마설마하며 사람들에게 술레 가는 버스가 있는지를 계속 물었다.
뒤를 따라오던 어떤 남자가 본인도 가는 길이니 같이 가자고 한다.
굉장히 조곤조곤하고 수줍게 말을 한다.
결국 깐도지 호수 앞 정류장으로 돌아와 버렸다.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조금 짜증이 나려 했다.
그런데 길을 안내해준 남자가 버스 요금을 대신 계산해줬다.
길 안내도 모자라 이런 이벤트라니.
미얀마는 화낼 틈을 주지 않는다.
양곤엔 지하철이 없다.
하지만 그 비슷한 '양곤 순환열차'라는 게 있다.
양곤 일대를 한 바퀴 도는 기차인데 멀리 가는 건 아니기 때문에 서울 지하철 2호선을 기차가 돌고 있는 기분이다.
현지인들의 교통수단이고 낡은 기차이다 보니 매우 복잡하기로 유명하다.
꽉 찬 사람들 사이에 더위가 들어차고 혼돈이 밀려와서 버티지 못하고 중간에 내리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난 그런 번잡함을 미얀마의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양곤 순환열차를 택했다.
그리고 그건 내가 미얀마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다.
기차역 입구가 너무 입구가 아닌 것처럼 생겨서 헤매다 들어갔다.
그리고 알게 된다.
오늘 영업 종료.
긿잃은 나를 발견한 직원이 내일 오라고 한다.
저에겐 내일이 없어요 아저씨...
마지막 기차는 한참 전에 끝났다고 한다.
순환열차는 물론 다른 지역으로 가는 열차조차 없다.
시간표를 잘못 알려준 가이드북을 저주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아무도 없는 플랫폼에서 발만 굴렀다.
괜히 쓸 일도 없는 기차 시간표만 사진을 찍었다.
내가 사진을 찍은 건지 아쉬움을 찍은 건지.
뭔가에 미련을 안남기는 타입인데 오늘만큼은 후회가 밀려온다.
순식간에 갈 곳을 잃었다.
결국 허탈한 발걸음을 보족 시장으로 돌렸다.
살만한 건 없었고 론지 구경만 했다.
순환열차를 탈 생각으로 시간을 계산해서 중간에 시간이 어정쩡하게 떠버렸다.
시내 구경은 더 이상 할 게 없다.
계획이 틀어지니 힘도 빠져서 뭘 하고 싶지도 않다.
숙소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공항 갈 준비를 한다.
할 일 없다.
그렇게 끝이었다.
배고프다.
여행이 끝났다.
정말로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