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간, 행복과 실망 사이

바간 마차투어의 풍경

by 사십리터
미얀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불리는 바간
아름답기로 소문난 그곳, 나에겐 가장 못난 여행지로 남을 뻔한 도시...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간의 첫날은 불쾌하게 끝났다



1. 마차투어의 시작

양곤에서 바간까지 먼 거리를 달렸다.

야간버스의 좌석은 편안했으나 도로가 워낙 모나서 불안한 승차감을 느껴야 했다.

게다가 JJ버스가 춥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미얀마의 1월 날씨는 해가 없으면 제법 쌀쌀한데 버스는 쉼 없이 에어컨을 틀어댄다.

심지어 내가 탄 버스는 에어컨이 고장 나서 정비소에 들리기까지 했는데 그때 에어컨을 고치지 않았다면 더 편한 잠자리가 됐을 것 같다.

후드를 눌러쓰고 론지를 담요 삼아 추위를 막은 채 비포장도로를 달려 새벽 5시쯤 미얀마 여행의 두 번째 도시 '바간'에 도착했다.


불교의 나라 미얀마의 도시 바간은 세계 3대 불교 유적지 중 하나로 미얀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이다.

미얀마의 고대 수도였던 바간에는 수천 개의 사원이 있고, 사원밖에 없다.

때문에 바간 여행이란 사원여행을 의미한다.

때문에 바간 여행이란 사원 관람 방법의 선택이다.

여행자들은 자전거, 이바이크, 택시, 마차 중 하나를 빌려 수천 개의 사원 사이를 누빈다.

열기구라는 특별한 방법도 있지만 시간과 돈이 넉넉해야 하기에 보통은 생략한다.

4가지 방법 중 택시투어는 가장 편하지만 비용 때문에 보통 3명 이상 그룹 여행자들이 선택한다.

1인 여행자는 보통 이바이크나 자전거를 이용한다.

하지만 난 겁도 많아서 자동차, 트럭, 마차, 오토바이, 자전거가 모두 함께 다니는 난해한 바간의 도로를 운전할 자신이 없었기에 마차투어를 선택했다(하지만 다시 바간에 간다면 무조건 이바이크를 빌릴 것이다).

어느 파고다에 올라가 바라 본 크고 작은 파고다가 모인 바간의 풍경


보통 야간 버스로 바간에 도착하면 버스 앞에 마부들이 줄을 서서 손님을 데려간다.

내 경우엔 버스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찾는 작은 소동을 벌이다 마지막에 내려서 2명의 마부만 남아 있었다.

마부들은 버스회사 직원처럼 자연스럽게 짐칸에서 번호를 확인하고 짐을 꺼내기 때문에 어느새 따라가게 된다.

잠에서 덜 깨고 핸드폰을 잃어버릴 뻔해서 경황이 없던 난 정신을 차리고 가격을 물어봤다.

알고 있는 정보에 바간 마차투어의 일반적인 가격은 40,000짯 전후.

보통 이 투어는 일출을 보고 숙소에 데려다주면 아침을 먹고 샤워를 한 뒤 마부를 다시 만나서 하루 종일 사원을 보다 일몰까지 보는 코스다.

나는 계산기를 들어 가격을 물어봤고 마부는 코스별로 다른 가격을 설명했다.

영어를 못해서 솔직히 반도 못 알아들었다.

대충 일출만 보면 3만, 그 이후에 사원 투어까지 한다면 5만이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일몰까지 보려는 생각에 더 긴 코스로 하겠다고 말했고, 가격을 계산기에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마부는 5만을 찍었다.

알고 있는 가격보다 비싸서 흥정을 시도했으나 마부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피곤했고 흥정엔 재주가 없고 이제 어둠 속에 남은 마차는 1대뿐이라 방법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마차투어의 서막이 올랐다.

나를 태우고 바간을 달린고마운 말


2. 싸다 싸~ 사원 3,500개에 25,000원

미얀마엔 도시 입장료라는 신박한 계산법이 있다.

이 입장권 하나면 놀이공원 자유이용권처럼 도시에 있는 모든 유적의 입장권을 한 번에 구입하게 되는 것.

서울이라면 고궁 통합입장권쯤 되는 방법이려나?

대표 관광도시인 바간의 입장료는 25,000짯으로 비싸 보이지만 3,500여 개 사원의 입장권을 한 번에 샀다고 생각하면 납득할만한 가격이다.

사실 이 입장권은 파고다나 호텔에서 검사를 한다고 하는데 바간에선 검사를 요구받은 적이 없다.


일출을 볼 사원에 가기 전까지 제법 찬 공기가 닦아 준 눈과 정신으로 새벽하늘의 별을 감상했다.

문득 대학 시험문제였던 '문학 속 별의 의미 서술하기'가 생각났다.

다그닥 다그닥 말이 걷고 뛰는 발소리마다 별에서 시험문제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시험이 그렇게 유쾌한 생각은 아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나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봤다.

아마도 졸업 후엔 별과 관련된 추억이 없어서 그랬나 싶다.

(만약 그 시험을 보기 전에 이 별을 봤다면 바간의 새벽하늘 사진을 제출하고 장렬하게 에프를 받았을 텐데!)

일출 관람에 앞서 별빛이 먼저 감동을 준다.


마차는 곧 멈춰 서고 안내인과 개 한 마리가 나타나 랜턴을 들고 나를 사원 앞까지 안내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둠은 별빛을 보기엔 좋지만 24시간 밝은 서울에 익숙한 내가 걷기 좋은 곳은 아니다.

랜턴을 들고 안내하는 아저씨를 따라가며 나도 핸드폰으로 불빛을 하나 더 밝혔다.

내 뒤로는 든든하게도 동네 개님께서 나를 지키러 따라와 주셨다.

풀숲에 난 오솔길을 따라가자 사원의 형태가 보였고 흙냄새가 나는 좁은 계단을 올라갔다.

사원의 좁은 어두운 계단

올라가니 파고다 꼭대기가 보인다.

바간 대부분의 파고다는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다.

가파르고 제대로 된 계단도 없지만 여행자들은 그곳에 올라 일출과 일몰을 본다.

유적과 일상이 구분되지 않은 그들이 참 부럽다.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금을 그어 두지 않고 이렇게 오르고 만지며 소중함을 느끼는 것도 어쩌면 유적을 지키는 방법이 아닐까?

내가 오른 파고다에는 간당간당한 나무 사다리가 있었고 그 위에 먼저 온 여행자들이 명당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중간쯤 되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원에 오르기 위해서는 양말도 허락되지 않고 오직 맨발로 가야 하기 때문에 얇은 바지에 반팔, 후드 하나만 뒤집어쓴 나는 추위에 떨며 해를 기다렸다.

앉아있으니 하나 둘 사람들이 몰려와 만석이 된다.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주변은 조금씩 밝아진다.

생각해보니 일출을 참 오랜만에 본다.

해 뜨면 자고 해지면 깨는 유럽형 생체시계를 탑재한 야행성 인간이다 보니 흡혈귀처럼 어둠 속에서만 살았다.

해 뜨는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면 매일 밝게 하루를 시작했을 텐데.

생각해보니 우울하고 어두운 날은 자진해서 만들고 갇힌 시간이었구나 싶어 잠시 반성했다.



3. 도착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확인하자

추위는 중력과도 같아서 상대성이론을 성립하게 한다.

차가운 사원에 여름바지를 입고 앉아 있으니 한 시간이 5시간쯤으로 느껴진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누군가의 명언처럼 갓난아이가 뒤집기를 하듯 지구는 자전했고 해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일출은 생각보다 늦었고 추웠다.


조금씩 밝아지는 세상을 담기 위해 나는 2개의 핸드폰에 아이패드까지 동원해서 카메라에 동영상과 사진을 차례로 담았다.

하나는 사원 기둥에 기대 동영상을 찍고 하나는 파노라마부터 흑백모드까지 이런저런 필터로 사진을 찍어댔다.

본래 사진 찍기를 즐기는 사람은 아니지만 딱히 할 일도 없고 말동무도 없기에 자연스럽게 포토그래퍼가 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둠부터 밝음까지 담은 인생의 역작을 동영상으로 남겨보자 싶었다.

그러나 이 원대한 계획은 배터리가 떨어지는 바람에 자동으로 꺼진 핸드폰 때문에 장렬히 실패했다.

한국 욕을 해본다.

어쩌면 옆에 있는 사람들도 저마다의 언어로 욕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괴이한 상상을 해본다.

남들 들리게 욕하는 것도 여행자의 특권이라 생각하며 보조배터리를 꺼냈다.

그렇게 혼자 조울증을 겪다 보니 밝아진 하늘에 동그란 해가 올라온다.

주변이 밝아진 건 한참 전이지만 해는 밝아진 하늘에서 조금 더 기다려야 올라온다.

뭐든 다됐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한발 더 가고, 한 번 더 기다려야 내가 찾던 순간이 온다.

어쩌면 이게 끝이라고, 이제 한계라고, 더 가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한 때가 밝기만 하고 해는 올라오지 않은 순간이었을까 싶어 덜컥 겁이 났다.

한 번만 더 노력하면 떠오른 해를 만질 수 있는 순간이 있지 않았을까?

해는 올라왔고, 바간 마차투어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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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 시간에 맞춰 사원 위로 날아들기 시작한 열기구들


4. 꼬이기 시작한 일정

내가 알기론 마차투어는 일출을 보면 숙소에 들려 여행자가 몸을 추스를 시간을 준다.

하지만 마부는 체크인을 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니 더 둘러보다 호텔에 데려다준다고 한다.

뭔가 잘못되었단 생각이 들었지만 난 평소와 달리 여행지에선 무한 긍정 모드가 되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별과 해를 보고 기분이 매우 좋아진 탓도 있었다.

마차가 달리니 어둠 속에선 보이지 않았던 흙먼지가 보였다.

흙길을 달리다 보니 가끔 마스크가 절실할 정도로 흙먼지가 일고, 말을 쫓는 날파리 떼도 등장한다.

설명을 마치고 설명문을 읽는 가이드 할아버지

먼지와 아웅다웅하다 보니 두 번째 사원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자 어떤 할아버지가 다가왔다.

자신을 가이드가 아닌 고고학자라고 소개한 할아버지는 나에게 사원을 소개한다.

바간의 사원에 상당히 애정이 넘치는 분이었다.

물론 영어를 못하는 난 몇몇 단어만 듣고 눈치와 추론으로 알아들었다.

숨겨진 방에서 자신이 발견했다는 머리 없는 불상까지 보여 준 할아버지는 바간엔 3천 개 이상의 사원이 있고 평생 봐도 다 보지 못할 숫자라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바간의 유적은 이렇게 사랑받고 있구나.


다시 마차에 올랐고 조금 더 밝아진 길을 달렸다.

다음 사원으로 가는 줄 알았던 마차는 어느 마을에 들어선다.

‘민카바’라는 원주민들의 마을이다.

바간의 전통 마을인데 별로 오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마부에게 들리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못 알아 들었는지 알아듣고도 데려왔는지 판단이 잘 안 섰다.

하지만 마부는 여기서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라고 말한다.

난 밥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커피만 한잔 주문했다.

식당 주인은 바구니를 열어 보여주더니 커피 종류를 선택하라고 한다.

다양한 믹스커피와 차가 있었고, 블랙커피를 하나 고르니 뜨거운 물과 함께 봉지를 준다.

내가 봉지를 뜯어 직접 타 먹어야 했다.

점점 이상했지만 반대편에서 나를 데려 온 마부가 식사를 시작했다.

300원짜리 커피를 마시고 기웃거리자 어느 소녀가 다가와 마을 안내를 해주겠다고 한다.

아, 마을 소개하고 돈 달라는 거구나.

직감은 했지만 마부의 식사를 기다려야 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둘러보자 싶어 따라갔다.

소녀는 물레 돌리는 사람들, 마구간의 말먹이 자르는 방법 등 자신들의 일상을 보여주고 마을 곳곳에 있는 기념품점에 3번쯤 나를 데려간다.

마을 풍경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딱 하나 만족스러웠던 건 다나카였다.

미얀마에선 ‘다나카’란 나무를 갈아서 만든 화장품을 선크림처럼 얼굴에 바르고 다닌다.

진흙을 바르듯 얼굴에 흔적이 그대로 남기 때문에 한 번 정도 체험만 하고 싶었는데 소녀가 나무를 갈아 얼굴에 직접 발라줬다.

하지만 마지막에 아주 당연하게 돈을 요구한 이 어린 소녀를 보니 예상은 했지만 한숨은 좀 나온다.

잔돈이 별로 없어서 적당히 돈을 챙겨주고 마을을 나와 다시 마차에 올랐다.

별을 보던 시간만큼 바간이 예뻐 보이지는 않았다.



5. 사원 투어, 그 무료함에 대하여

유럽 장기 여행자들은 보통 한 달 정도가 지나면 병에 걸린다.

바로 성당과 성을 너무 많이 봐서 어딜 가도 감동하지 못하는 병이다.

유럽의 도시란 성당과 광장을 중심으로 발전한 곳이고, 어딜 가도 그 도시의 대표 성당과 성을 본다.

하지만 건축학도나 독실한 신자가 아닌 이상 모든 나라의 모든 건물이 다 똑같아 보인다.

보통 이 병은 유럽여행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크게 갖는 사람들이 심하게 걸린다.

무감동, 무재미 때문에 의욕이 사라지고 여행을 즐기지 못하게 되는 병증이 따라온다.

그런데 이 병이 바간에선 더 쉽게 왔다.

20170108_102026.jpg 어느 사원의 풍경

그나마 유럽에선 조금은 다른 성당을 하루 하나씩 보는데 바간에선 같은 도시에 있는 3,500여 개의 사원을 하루 만에 본다.

물론 3,500개 사원에 모두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많아야 10개 정도 되는 사원을 보지만 불교 신자도 아니고 앙코르와트쯤 되는 거대한 사원만 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흥미가 떨어지기 쉽다.

나도 비슷한 풍경만 보니 점점 감흥을 느끼기 어려웠고 사원이 아닌 다른 일에서 재미를 찾기 시작했다.

마차를 탄 내 사진을 찍는 여행객들에게 손을 흔들고 나도 그들의 사진을 찍었다.

부처님보단 개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원에 사는 개들에게 간식을 주면서 놀았다.

그러다 시간이 1시 가까이 되고 마부는 이제 호텔로 가자는 반가운 소리를 한다.



6. 그건 정말 적당한 가격이었을까?

미얀마는 관광지로 주목받기 막 시작한 나라다.

아직 자본이 많이 들어오지 않은 불교문화권이어서인지 사람도 좋고 치안도 좋은 편이다.

그렇다 보니 아직 관광객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사람이 없단다.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다른 여행보다 안심하고 다녔던 것 같다.

그래서 설마 인상 좋은 이 마부가 그럴 줄은 몰랐다.

호텔에 데려다주고 잠시 쉬었다 나오면 일몰을 볼 사원에 데려다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호텔에 도착하니 투어는 끝났고 돈을 달라고 한다.

내가 아무리 영어를 못하지만 선셋이란 말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

황당했지만 사실 많이 힘들었기 때문에 차라리 잘됐다 싶어 그냥 돈을 줬다.

그런데 이건 일출만 보고 끝나는 돈이라면서 더 줘야 한단다.

점점 황당했고 소리라도 지를까 생각했지만 마차엔 아직 내 짐이 실려 있었고 나는 현지인을 상대하기엔 무리인 피곤한 20대 여자였다.

서서히 표정이 변해가는 이 아저씨에게 그냥 돈을 줄 수밖에 없었다.

상당히 억울하고 화났지만 방법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 베이징에서 콜라를 10배 비싸게 사 먹은 뒤 처음 써본 바가지였다.

체크인 후 호텔 침대에 누워서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인데 이런 기분일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바간의 마차투어 비용이 심각하게 올랐을 거라고 세뇌를 시켜본다.

바간에 실망이 싹텄지만 그 마부를 빼고는 나쁜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잠깐 잠들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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