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지곤 파고다, 피곤함의 정점

관광지가 싫은 이유

by 사십리터

점점 피곤해지는 바간 여행...
쉐지곤 파고다에서 만난 뜻밖의 인물



1. 낯선 땅에서 몸을 기댈 잠자리 구하기

미얀마는 관광 인프라가 잘 갖춰진 나라는 아니라 숙소 구하기가 조금 어렵다.

외국인이 투숙 가능한 호텔은 국가의 허가가 필요하고 인터넷 예약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물론 가이드북이나 인터넷에 나오는 숙소들은 대부분 외국인 투숙이 가능한 곳이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다만 맘에 드는 숙소를 예약하는 방법이 문제다.

현지에 가서 호텔 찾아 삼만리를 하는 여행자도 있고 이메일이나 전화 예약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난 그 무엇도 아닌 제일 편하게 부킹닷컴과 아고다를 이용했다.

전화나 메일 예약보다 조금 비쌀 수 있고 아직 신용카드 정보 관리가 허술하다고 하던데 그래도 제일 속 편한 방법이었다.

미리 한국에서 알아봤다면 더 싸게 예약이 가능했겠지만 일정이 바뀔 수 있단 생각에 예약을 최대한 미뤘다.

그래서 방이 있는지 바로 확인하고 예약 가능한 아고다가 유용했다.

인터넷 후기와는 달리 인터넷으로도 꽤 많은 호텔 검색과 예약이 가능했다.


나는 혼자 다니는 여행자다 보니 보통 가장 저렴한 도미토리를 선호한다.

바간의 숙소는 양곤에 와서 급하게 정한 숙소였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다른 지역에 비해 숙박비가 비싼 느낌이었고 나는 거의 유일하게 선택 가능한 도미토리를 예약했다.

반신반의했지만 꽤 고급 호텔 안에 있었고 사진상으로 매우 깨끗해 보였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예약을 했다.

제일 오른쪽이 내가 사용한 침대

그렇게 선택한 호텔은 종합적으로 만족이었다.

작지만 수영장도 있는 호텔이었는데 도미토리 투숙객도 수영장 이용이 가능했고 뷔페식 조식도 정갈했다.

침대도 깔끔했고 수건과 생수, 비누, 칫솔까지 매일 새것으로 바꿔줬다.

방은 4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는 없었지만 체크인 수속을 마친 나를 기다린 호텔 직원이 내 가방을 들어줬다.

체크인하면서 다음 여행지인 만달레이로 가는 보트 예약을 부탁했는데 몇 시간 뒤 직원이 내 방으로 찾아와 직접 티켓을 전달해주기까지 했다.

호텔 복도에 다나까를 직접 갈아 바를 수 있는 화장대가 있었다

도미토리에서 호텔 서비스를 받는 기분이 새로웠다.

다만 이 숙소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온수가 안 나온다...

미얀마의 숙소는 기본적으로 온수와 수압을 체크했어야 하는데 설마 이 정도 호텔에서 온수가 안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찬물로 샤워를 해야 했다.

같은 방을 사용한 독일인 여행자가 샤워를 하면서 비명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2. 내가 중국인으로 보이니?

마차투어 가격 때문에 한 번씩 화가 올라왔지만 고작 이런 일로 여행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호텔에 들어와서 기분이 좋아질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샤워를 하고 청결한 침대 시트가 몸에 감기자 기분이 좋아졌다.

단순함이란 때론 좋은 무기다.

피곤했지만 막상 잠은 오지 않았고 배도 조금씩 고파왔다.

생각해보니 야간 버스에 타기 전 빵 하나 먹고, 아침에 커피와 함께 준 땅콩 몇 개를 집어 먹은 게 다였다.

가방 속에서 과자 몇 개 꺼내고 식당을 찾아 나갈 준비를 하는데 직원과 함께 중국인 여행객이 들어왔다.

그런데 다짜고짜 나에게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중국어로...

순간 너무나 자연스러운 태도에 눌려 영어로 말하고 있는데 내가 한마디도 못 알아듣나 싶었다.

아니면 혼잣말?

둘 다 아닌 것 같아 최선을 다해 어렵게 한마디를 꺼냈다.

I can't speak Chinese.

내 정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우리 셋은 모두 각자의 방법으로 당황했다.

아마 이 직원은 내 짐을 가져다주면서 중국인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고, 이 중국인은 같은 방에 중국인이 있단 말을 듣고 이 방을 예약하기로 결정했던 모양이다.

그냥 다 같이 웃었다.


외국인의 국적을 알아맞히는 건 참 힘든 일이다.

나도 한, 중, 일 3개 국가가 아니면 누군가의 국적을 맞추지 못한다.

상대의 외형을 보고 알아낼 수 있는 정보라는 게 이렇게 한정적이다.

얼굴을 보고 그 나라의 국적조차 알 수 없는데 인간관계를 맺다 보면 첫인상으로 모든 걸 판단하고 해결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더라도 내 주변 사람만이라도 그가 누구인지, 얼굴을 보고 당연히 그럴 것이라 단정했던 일이 없는지 한 번쯤 돌아봐야겠다.


밥을 먹을 생각이었던 나는 방을 나섰다.

그 뒤로 그 중국인은 방을 옮겼는지 다시 볼 수 없었다.

문득 오사카에서 길을 찾아 헤매던 중 지나가던 일본인이 나에게 길을 물어본 추억이 떠오른다.

갑자기 배가 많이 고팠다.



3. 먹고 마시는 즐거움

어슬렁거리다 식당에 갔을 땐 오후 4시쯤 되는 어정쩡한 시간이었고 몇몇 여행자만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음식을 즐길 생각보단 배를 채울 생각이라 가장 싼 볶음밥과 맥주를 시켰다.

어느 나라를 가도 꼭 먹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먹거리들이 있지만 혼자서는 주문하기 힘든 음식이 많기 때문에 미얀마에선 식도락 여행은 포기했다.

게다가 독일에선 혼자서도 학센을 뜯었던 나지만 미얀마에선 꼭 먹고 싶단 생각이 드는 음식이 없었다.

미얀마는 식문화가 크게 발전한 나라는 아닌 것 같다.

미얀마 안에서도 고급식당은 주로 태국 음식점이고, 눈에 띄는 전통음식도 없었다.

게다가 음식 물가가 생각보다 비싸다.

가이드북에선 미얀마 사람들이 아침으로 주로 먹는 모힝가라는 국수가 한 그릇에 500짯 정도고,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식당은 그보단 비싸지만 대부분 2,000~3,000짯 사이로 한 끼 해결이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미얀마의 물가상승률은 가이드북보다 빨랐다.

미얀마 비자를 발급받을 때 비자 가격이 갑자기 2배 가까이 올라서 물가가 혼란스러울 것이라 예상은 했었다.

실제로 여행자를 상대하는 업소들은 현지 물가와 비교했을 때 비정상적인 수준인 곳이 많다.

가이드북에 소개된 식당은 대부분 메뉴판에 라벨지를 붙여 가격을 2배 가까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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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로컬 브랜드인 미얀마 비어가 맛있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최대한 많이 먹어둘 생각이었다.

맥주는 냉장고에서 꺼낸 차가운 유리잔과 함께 나왔다.

미얀마 맥주는 생각보다 청량하고 가벼운 맛이었고, 뜨거운 햇빛을 타고 탄산이 더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조금 늦게 나온 볶음밥은 생각보다 양이 많아서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역시, 먹고 마시니 즐겁더라.



4. 쉐지곤 파고다, 원수를 만난 외나무다리가 되다

바간은 미얀마 최고의 관광지고 건기인 1월은 미얀마 여행의 성수기인데도 여행자를 만나기 힘들다.

그래도 큰 파고다에는 외국인들이 보이는데 시장 근처 여행자 거리에는 생각보다 외국인이 너무 없다.

관광지라 외국인에게 익숙할 줄 알았는데 조금만 골목으로 지나가는 나를 현지인들이 신기하게 본다.

차도 옆에 있던 마을 사람들의 운동장

일몰이 가까워 강렬한 태양도 한풀 꺾여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쉐지곤 파고다에 들리기로 했다.

쉐지곤 파고다는 바간의 유적 번호 1번을 담당하는 상징적인 파고다다.

황금빛 건물에 조명이 더해진 일몰 시간에 아름다운 명소라고 들어서 해가 넘어가기 전에 도착하기 위해 열심히 걸었다.

이 길이 맞는지 의심이 들 때쯤 파고다가 보인다.

꽤 큰 파고다라 입구가 어느 쪽인지 헷갈린다.

가까이 가는데 어떤 여자가 자꾸 나를 부른다.

규모가 큰 파고다는 사원에 들어가는 입구에 긴 복도가 있고 그 복도에 상점가가 형성되어 있다.

그곳의 상인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나를 보고 이쪽으로 와야만 한다고 10번도 넘게 소리를 지른다.

무시했는데도 정말 끈질기게 말하더니 내가 입구를 발견하자 그제야 물러선다.

입구에서 론지를 걸치고 신발을 벗어 가지고 있던 비닐봉지에 담아 파고다에 입장할 준비를 마쳤다.

금빛 건물은 공사 중인지 대부분을 가려놔서 생각했던 찬란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원을 한 바퀴 둘러보자 이런저런 전설이 깃들어 있는 종이나 우물이 보인다.

뒤쪽으로 가자 안쪽에 여자들이 모여 앉아 있다.

그 옆에 조그만 강아지가 한 마리 있어서 사진을 찍고 있으니 말을 걸기 시작한다.

그중 한 명이 다가와 저쪽 유적에 가보라고 말한다.

뭔가 안내를 해주겠단 말인가 싶어서 따라가 봤다.

걸어가는 길에 내가 어설프게 걸친 론지를 보고 잘못 입고 있다면서 고쳐 입혀줬다.

그런데 갑자기 파고다 뒷문으로 나가더니 쉐지곤 파고다와 관련 없는 용 동상을 보여준다.

뭔가 당했다는 직감이 뒤늦게 왔다.

여자는 이 용에게 꽃과 물을 뿌려 복을 빌어야 한다면서 나에게 꽃을 준다.

꽃값을 받으려 한다는 걸 눈치채고 싫다고 돌아서려 하는데 동상 옆을 지키던 할머니들까지 가세해서 강제로 꽃을 나한테 안긴다.

내가 또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척 따라왔구나 싶어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여자는 계속 따라온다.

다시 파고다 안에 들어온 내 주변을 계속 맴돌았고 어느 부처님 동상을 보려 하자 이번엔 손가락 크기쯤 되는 작은 꽃을 보여주면서 여기서 복을 빌어야 한다고 말한다.

돈을 받아내려는 마음이 보였지만 론지도 입혀줬고 파고다에서 한 번쯤 복을 빌어보자 싶어 받아 들었다.

복을 빌자 꽃을 내 귀에 꽃아 주고 돈을 달라고 한다.

얼마가 적당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1,000짯을 주고 그 여자와 헤어졌다.

관광객이란 언제나 표적이 된다.

기운이 빠져서 그만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입구로 가다 오전 마차투어의 마부와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마부는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서로 모른 척 지나갔다.

부처님의 자비 가득한 파고다에서 나를 가장 기분 나쁘게 만든 사람을 만나다니.

만감이 교차했지만 그냥 웃어 넘기기로 했다.

만약 저 마부가 날 얕보고 작정하고 바가지를 씌웠다면 그 순간 엄청 찔렸겠지.

혹시 아까 꽃값 받아간 여자랑 아는 사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나가는 길에는 들어올 때는 그냥 지나친 상점가로 구경하며 나갔다.

아까 나에게 이쪽으로 와야 한다고 소리치던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나를 보더니 어느 나라 사람이냐 물어서 한국인이라 했더니 안녕하세요라고 어설픈 한국어를 하며 자기 가게를 구경 오란다.

너무 기운 빠지는 하루라 더 이상의 호객 행위는 당하고 싶지 않았다.

빠져나갈 출구가 어디쯤인지를 찾는데 갑자기 종이 브로치를 나에게 달아주려 한다.

좀 전의 꽃 소동이 생각나서 기겁하며 싫다고 손을 뿌리쳤다.

그런데 이 여자 힘이 보통이 아니다.

Free를 외치며 강제로 내 가슴에 나비모양으로 만든 어설픈 종이 브로치를 달았다.

마음에 이어 몸까지 지친다.

공짜라더니 결국 싫다고 하는 나를 힘으로 불상을 파는 자기 가게로 질질 끌고 간다.

내가 어디 가서 막 끌려다닐 무게는 아닌데 그 작은 여자의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조금만 더 시달리면 욕이 나올 것 같아서 가려는데 어디서 배웠는지 언니라고 어설픈 한국어를 하면서 끝끝내 의자에 앉게 만든다.

불상을 팔고 있었는데 물건을 설명하는 사이에 일어나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다.

허탈했다.

파고다 관람을 하러 온 도시에서 하루 동안 기억나는 일이 호객당한 일과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뿐이다.

다른 동남아 여행지에선 흔한 일이긴 하지만 미얀마는 아직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찾아왔는데...

계속되는 실망을 해결해줄 무언가가 나타나길 바라면서 숙소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터덜터덜 너덜너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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