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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Oct 28. 2017

피오르드를 따라 가는 길

노르웨이 송네 피오르드 투어

해외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교과서에서 보던 무언가를 실제로 보는 것이다. 주로 역사책에 나오는 건물이나 명소가 그렇다. 드물게 지리책, 과학책에서 본 사진 중 기억에 남은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피오르드'다. 지리 시간에 "자연은 정말 별걸 다 만드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던 기이한 지형들. 그중 가장 멋지다고 생각했고 꼭 실물을 보고 싶었던 것이 '피오르드'다. 



# AM 8:05, 나는 또 기차에 탄다

이른 아침, 나는 또다시 기차역에 있다.

요즘 대부분의 일정을 기차 또는 기차역에서 보내는 기분이다.

이번엔 오슬로 기차역 코인로커에 꾸역꾸역 배낭을 넣고 있다.

영화에서 마약이나 총을 불법 거래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

눈도 제대로 못 뜬 시간에 이런 짓을 하는 이유는 '피오르드' 때문이다.

"빙하의 침식으로 생긴 U자형의 골짜기."

교과서에서 봤던 피오르드의 설명이다.

미술책도 아닌데 아름다움이 느껴진 유일한 교과서가 지리책이었다.

지형을 설명하는 사진들은 수업 중에 때때로 감탄을 불렀다. 

특히 피오르드의 사진은 대단했다.

세계에서 가장 긴 피오르드인 '송네 피오르드'는 멋진 만큼 시험문제의 답으로 나오면 여길 꼭 가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아침 8:05에 피오르드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오슬로 기차역 코인로커에 짐을 내려놓고 있는 이유다.

노르웨이의 기차엔 놀이방도 있었다. 


# 첫 번째 코스 : 오슬로(Oslo) ~ 뮈르달(Myrdal)

노르웨이는 피오르드가 발달한 나라인 만큼 여러 피오르드가 있다.

하지만 계절에 따라 볼 수 없는 피오르드도 있다.

내가 선택한 송네 피오르드는 1년 내내 볼 수 있어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다.

한 스팟이 아니라 204km에 이르는 산과 계곡을 봐야 해서 기차, 배, 버스를 모두 동원해서 하루종일 피오르드가 만든 지형을 따라가는게 피오르드 여행이다.

오슬로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해서 교통수단을 바꿔 베르겐에 도착하는 과정이 관람 동선이다.

간식거리를 들고 투어를 위해 기차에 올라탔다.

4월이지만 아직 한겨울 풍경

잠깐 졸고 일어나니 피오르드가 펼쳐졌다.

한참 밖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잠시 자연 속에 끼어들어 있는 느낌이다.

나무와 숲을 자연이라고 생각했는데, 눈과 얼음이 내가 위대하다고 생각했던 자연을 삼키고 있다.

내가 크다고 생각했던 것을 작게 만드는 거대함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지 아직도 적당한 표현을 모르겠다.

기차 안에서 찍은 영상. 이렇게 보니 그때 본 풍경과 많이 다르다.


# 두 번째 코스 : 뮈르달(Myrdal) ~ 플롬(Flåm

중간쯤 오니 눈보라가 친다.

4월 중순이 넘어가는데 제법 굵은 눈이 몰아치는 것을 보니 할 말이 없다.

이런데 살면 화이트 크리스마스 같은 일에 연연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오슬로에서 출발한 첫 번째 기차에서 내려 플롬에서 산악 열차로 갈아 탈 시간에도 눈이 내렸다.

기차에서 내리자 바로 앞에서 산악열차가 기다린다.

플롬으로 가는 산악열차의 별명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열차다.

피오르드를 가로지르는 열차에 적당한 별칭이다.

내부는 포근한 나무색이라 눈보라 치는 날 산장에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이 산악열차는 관광열차다 보니 중간에 잠시 정차하는 곳이 있다.

바로 '효스폭포(Kjosfossen)'다.

무려 93m짜리 폭포다.

이곳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보여주기 위해 열차는 5분간 정차한다.

정차라기보다 포토타임에 가깝다.

내가 방문한 시기는 물이 많이 떨어지는 계절이 아니기 때문에 웅장한 광경은 아니었다.

그래도 피오르드가 얼마나 다양한 자연을 품고 있는지 알기엔 충분했다.

여름이 아니라 물이 흐르지 못하고 얼음이 덮여있다

                                                          

# 세 번째 코스 : 플롬(Flåm) ~ 구드방겐(Gudvangen)

한 시간 쯤 달려 플롬에 도착했다.

사실 다음 목적지까지는 버스를 타면 빠르지만 피오르드를 방문한 사람 중에 시간에 연연하는 사람은 없다.

피오르드를 더 잘 보는 방법을 따라갈 뿐이다.

나도 피오르드가 만든 물길을 돌아 가는 배를 선택했다.

티켓을 사고 잠깐 남는 시간 동안 주변을 돌아봤다.

마트가 있어서 대부분 여기서 끼니를 해결했다.

나도 간단한 도시락을 사서 맑은 물이 보이는 자리에서 먹었다.

빙하가 만든 자리에서 먹는 샌드위치를 먹다니 감격이다.

기차를 타고 플롬에서 내리면 한쪽은 기차역, 한쪽은 항구다. 둘 다 매우 작다.

시간에 맞춰 배에 탔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밖으로 나와 있다.

바람이 차서 안과 밖을 오가며 피오르드의 바람을 느꼈다.

휘센 에어컨 광고에서 피오르드의 바람을 들먹이던 기억이 있는데 기계 따위가 피오르드의 바람을 만들어 낼 리 없다.

하지만 광고 제작자가 시원한 바람의 이미지를 잘 찾아냈다는 점은 인정한다.

분명 바람은 차갑고 다소 거세지만 기분 좋게 몸에 감겼다.

고작 몇 시간 동안 하늘은 맑았다가 흐리기를 반복했다.

배를 탄다거나 유람을 한다기보다 항해를 하는 기분이다.

협곡 사이로 난 물줄기를 따라가는 길.

더럽힐 방법이 없어 깨끗하게 남아 있는 물.

피오르드라는 자연이 그 안에 속하는 작은 자연들을 지키고 있었다.


# 네 번째 코스 : 구드방겐(Gudvangen) ~ 보스(Voss)

절대 사람이 살지 못할 것 같은 이곳에도 마을이 있다.

중간중간 보이는 집들은 인간이 살지 못하는 곳이 없단 걸 깨닫게 해준다.

자연과 인간에 번갈아 감탄하다 보면 다음 목적지에 도착한다.

항해 끝에 도착한 이번 마을은 구드방겐이다.

여기서 사람들을 졸졸 따라가면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이번엔 피오르드를 가장 가깝게 느끼는 순서다.

정확히 말하자면 피오르드 안에 들어와 있으니 피오르드의 전경을 보지 못하는 상태다.

강원도 산길을 가는 기분도 든다.


# 다섯 번째 코스 : 보스(Voss) ~ 베르겐(Bergen)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가니 보스에 도착했다.

여기에선 다시 기차를 타고 베르겐까지 가야 한다.

새벽부터 일어나 온종일 앉아 있었는데 어느새 저녁이 가깝다.

캐리어나 배낭을 가지고 나와 같은 코스를 움직이는 사람도 제법 있는데 그들의 짐이 무거워 보인다.

슬슬 풍경이 질릴 만도 한데 아직도 좋다.

드디어 오늘의 최종 목적지 베르겐에 당도했다.

베르겐에 도착한 순간까지도 피오르드 속에 더 오래 있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몇 년 전 개봉한 겨울왕국을 좋아해서 당시 관객 수 집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더빙판, 원어, 4D까지 모두 챙겨봤다.

아마 애니메이션 자체의 즐거움도 있었지만 배경이 베르겐을 모티프로 했다는 점 때문이 아닌가 싶다.

베르겐은 동화 같은 마을을 넘어 진짜 동화의 배경이 된 마을이다.

겨울왕국 속 아렌델에서 베르겐을 떠올려서 더 몰입했던 것 같다.

베르겐은 예쁘다. 진짜 예쁘다.

당시엔 여행 초반이라 유럽 특유의 동화 같은 분위기에 면역이 없을 때였다.

그래서인지 해가 질 준비를 하는 베르겐에 도착했을 때 감탄이 나왔다.

피곤할만한 일정을 마친 후라 지칠 법도 한데 마을을 돌아보는 동안 눈에서 빛이 났다.

낮고 촘촘한 집과 상점들이 질서 있게 줄지어 있는 풍경은 테마파크 같다.

예쁜 색의 건물 사이로 서서히 깔리는 어둠, 마을을 감싸는 산, 그 속에 잠시 머무는 나.

잠시 무언가를 헤아려 보고 싶은 시간이다.


# 다시 오슬로

보통은 이렇게 하루를 꼬박 걸려 베르겐에 도착한 뒤 숙박을 하지만 나는 곧장 오슬로로 돌아간다.

미처 베르겐의 아름다움을 계산하지 못한 실수다.

그냥 길거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 즐거울 줄 알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다.

하지만 이미 베르겐에서 오슬로로 돌아가는 야간기차를 예매해뒀다.

이날 탄 기차는 지금까지 타본 전 세계의 야간 기차 중 가장 깨끗했다.

고시원 정도 되는 크기의 2인 1실이었는데 시베리아횡단열차가 80년대 여관이라면 이건 거의 특급호텔 수준의 청결함이었다.

게다가 침대 옆엔 작은 세면대가 있고 생수도 준비되어 있고 객실 문도 카드키가 있어야 열린다.

너무 열악한 환경에서 여행을 하다 보니 새삼 감탄하게 된다.

승객이 별로 없어서 객실은 독차지다.

배낭을 오슬로에 두고 온 탓에 짐을 푸를 필요도 없어서 쾌적하게 객실을 사용했다.

좁지만 편한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봤다.

침대엔 웰컴 초콜릿도 있다

하루 동안 벅찬 풍경을 봤다.

만약 신이 인간에게 천국을 맛보여 주려고 지구에 만든 설치물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피오르드일 것이다.

유럽여행 자체가 버킷리스트였지만 그 안에서도 특히 하고 싶고 보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나에게 피오르드는 유럽여행을 버킷리스트로 만들어 준 이유 중 하나였다.

그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라 노곤한 몸을 불편한 기차에 맡겨도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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