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냐에서 하노이까지 가는 길에 생긴 일
하노이에 있는 CGV에서 헐리우드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평창 올림픽 광고를 보고 있다. 나는 어느 나라의 어디쯤에 있는 걸까?
퐁냐 동굴에서 나왔을 때는 쏟아지는 비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파라다이스 동굴이 보고 싶었지만 날씨 덕에 포기했다.
이곳에 겨우 1박만 투자한 나 자신을 탓하며 다음을 기약해본다.
생각보다 시간도 많이 지나서 로컬 버스를 타고 동허이로 향했다.
보통 여행자들은 택시를 이용하지만 혼자서 택시를 타기는 부담스러워서 로컬 버스를 타봤다.
소문대로 매우 불친절한 버스 차장은 거스름돈을 주지 않는다.
하필 잔돈이 없어서 33,000동짜리 버스를 40,000동에 타야 했다.
버스에 탄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만 쏠려서 몇백원 때문에 싸울 의욕은 들지 않는다.
차장의 퉁명한 눈길보다 매섭게 달리는 버스는 한 시간 반 정도 후에 나를 동허이에 떨어뜨렸다.
예고도 없이 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정말 귀찮다는 듯 나에게 내리라는 몸짓을 했다.
잠들 뻔했던 나는 정신없이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짐을 정비하다 알아냈다.
아.
내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네?
동허이는 특별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기차역이 있는 도시다.
내가 동허이에 온 이유도 하노이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정말 딱 그 이유였기에 동허이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관광지도 아니고 외국인도 드문 곳이라 영어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았으나 불가능했다.
버스 안에서 졸다 뭔가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마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빠지는 소리였나보다.
그 소리를 무시한 나 자신을 쿵 때리고 싶다.
오전에 삼각대까지 동원해서 찍은 동굴 사진이 아른거린다.
내 사진 찍는 일을 싫어하기 때문에 태어나 처음 삼각대를 들고 떠난 해외여행이었다.
제법 좋은 사진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매우 기운이 빠진다.
핸드폰 케이스에 넣었던 운전면허증보다 사진 걱정이 앞선다.
내가 이러려고 사진 혼을 불태웠나 하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짐은 무겁고 말은 안 통하며 나는 갈 길이 있다.
몇 시간 정도 동허이를 돌아다니며 수소문해보았으나 내 운으로 해결할 일이 아님을 깨달았을 뿐이다.
동허이에 머문 시간은 몇 시간 안되지만 너무 큰 추억을 잃었다.
이게 이번 여행에서 사진을 별로 남기지 못한 이유다.
기운이 쪽 빠진 채로 동허이역까지 가는 길은 좀 험했다.
스스로를 혼내다 다시 기운을 내다 또 화내고...
방법이 없으니 한국으로 연락해서 핸드폰을 정지시키는 것으로 화를 마무리하기로 한다.
(나는 여행 중에 휴대폰을 2개 사용한다. 하나는 평소에 사용하는 갤럭시고 예전에 쓰던 아이폰 공기계를 현지 유심을 끼워 여행용으로 쓴다. 잃어버린 휴대폰은 한국용이었기 때문에 아이폰으로 카톡이나 인터넷은 모두 사용했다. 사진도 휴대폰 두 개로 나눠 찍어서 반 정도는 남았다.)
그러길 반복하다 동허이역에 도착했다.
기분 탓인지 기차역마저 불친절한 기분이다.
기차역 화장실을 지키는 사람은 내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화장실 값으로 20000동을 받는다.
휴게소 화장실이 2000동을 받았으니 심한 바가지다.
기차는 당연하다는 듯 30여 분을 지각했다.
침대는 생각보다 불편했고 잠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잘 쓰지 않는 안대와 귀마개를 끼고 뻐근한 잠을 청했다.
그렇게 동허이는 단시간에 가장 큰 임팩트를 남긴 도시가 되어버렸다.
아직 짜증이 남은 상태였으나 내가 잃어버린 탓이고 내 잘못이었기에 나쁜 기억도 잃어버리기로 했다.
뭐 어쩌겠는가.
여행을 멈출 수는 없으니 화를 멈춰야지.
하노이에 도착한 건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이었다.
사실 여기부터 조금 이상한 일정이 됐다.
오늘 밤에 또 야간기차를 타야 한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하고 있는 사파에 가기 위해서다.
하노이 자체는 큰 볼거리가 없기 때문에 본격적인 하노이 관광은 마지막으로 미루고 우선 사파에 먼저 간다.
기차역 안 매점에 있는 라커에 짐을 맡겨두고 하노이 구경을 나서본다.
우선 시간에 상관없이 갈 수 있는 호안끼엠에 갔다.
가는 길에 말로만 듣던 36 거리의 혼잡을 경험했다.
거리는 오토바이 덕에, 호수는 아침 운동하는 사람들 덕에 붐빈다.
호수 옆에는 조깅하는 서양인도 있고 단체로 체조하는 현지인들도 있다.
나는 그 중간쯤에서 구경을 하다 커피 한잔이 그리워져서 하일랜드 커피로 향했다.
카페에 앉아 있는 동안 들어오는 사람은 전부 외국인이다.
다낭에서는 대부분 한국 여행자만 보였는데 하노이에는 다양한 국적이 보인다.
진한 베트남 커피를 마시며 하노이의 아침을 보고 있으니 쌀국수 한 그릇이 간절해진다.
호수를 반 바퀴 돌아갔더니 베트남 쌀국수 체인점인 퍼홍이 보인다.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표준으로 생각하는 쌀국수 맛이 궁금해서 망설이지 않고 들어갔다.
체인점답게 깔끔하다.
주문하고 앉아 있으니 이번에는 호안끼엠의 반대쪽이 보인다.
관광지지만 도시의 아침은 어딜 가도 비슷하다.
주문한 음식을 먹는 내내 베트남이 보였다.
쌀국수를 다 먹으니 할 일이 없다.
그래서 나도 내가 정말 할 줄 몰랐던 일정을 잡았다.
영화를 본다.
베트남에 와서 재밌는 점 하나는 영화관의 대부분이 한국 기업이라는 거였다.
CGV와 롯데시네마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한국 기업들이 타국의 대중문화 시장에 얼마나 깊이 들어가 있는지 예상되는 대목이다.
처음엔 그냥 빈컴센터(하노이의 쇼핑몰)에 놀러 간 거였지만 두시간 정도 편하게 보내는데 영화관만 한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영화가 재밌으면 보고 못알아 들으면 잠들 생각으로 CGV에 갔다.
완벽하게 서울과 똑같은 인테리어 때문에 들어가는 순간 잠시 서울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노이보다 서울에 가까운 이곳에는 반미를 파는 뚜레쥬르가 있다.
아직 한국에서는 개봉하지 않은 영화와 베트남 영화 포스터만 빼면 완벽하게 서울이다.
영어버전 저스티스리그를 예매하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으니 cj 계열사인 tvN의 방송이 나온다.
한국의 흔적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인다.
관객 중 외국인이 꽤 있는데 아마 하노이에 사는 외국인들 같다.
나는 여섯명 그룹 옆에 앉았는데 국적이 모두 달라 보이는 그들은 영어로 대화했다.
영화 시작 전에는 한국 영화관 이상으로 광고가 많이 나온다.
졸려질 때쯤 갑자기 익숙한 단어가 보인다.
PyeongChang.
평창올림픽 광고가 나오고 있다.
광고 내내 하얀 설원이 나온다.
베트남에 전하는 평창 광고의 핵심은 그들이 경험하지 못한 ‘winter’다.
한창 대화 중이던 옆의 외국인들이 광고를 보고 서로에게 평창에 갈 건지를 물어봤다.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광고는 효과가 없나 보다.
이야기 도중에 웃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이 평창에 대한 비웃음은 아니었기를 바란다.
어쩌다 보니 베트남의 수도에 있는 한국 기업의 영화관에서 헐리우드 영화를 보며 올림픽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어느 나라의 어디쯤에 있는 걸까?
세계화라는 말도 촌스러워진 시대를 살고 있다.